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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 최초 일원상 그린 장소
대종사 최초 일원상 그린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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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 4년(1919) 소태산 대종사 최초로 일원상을 그려보인 곳 관련기록 : https://wonds.kr/chronology/view.php?id=4 장소 : 김제 금산사 송대 원본사진 : 교정원 문하사회부 성적지 조사사진-나무에 가려 복잡하고 저해상도 미등록 사진. 복원사진 : 원기 87년 건물 복원 전 촬영된 사진을 기록관리소에서 AI 이미지 복원. 복원날짜 : 원기 111년 1월 30일 복원기관 : 원불교 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만덕산 초선지 옛 모습
만덕산 초선지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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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 초선지 (옛 만덕암 터) 원본코드 : W1001208P0552 185_만덕산 김씨 산제당 터(만덕암) 복원날짜 : 원기 111년 1월 26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복원설명 : 소태산 대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 간행물에 실려있는 흐믜한 사진으로 AI복원한 사진으로 원불교 최초의 선을 났던 장소로 건물은 사라지고 없던 때 촬영 된 것으로 현재로선 가장 오래 된 사진이다. 만덕산 초선지 : 만덕산 초선지는 좌포에 사는 김 승지(乘志)가 1910년경에 부종병으로 고생하는 며느리 이현공을 위해 지어 준 3칸 기와집이 있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만덕암에서 3개월을 적공하였고, 원기 9년에는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12명의 제자와 한 달 동안 선(禪)을 났다. <2009,원불교기초이해> 만덕산성지 : 만덕산성지(萬德山聖地)는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만덕산 남쪽 기슭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원불교가 만덕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원기 6년 변산 봉래정사에서 정산종사가 소태산 대종사에게 “어디든지 네 발 걸음 내키는 대로 가 보아라”는 말씀을 받들고 길을 가던 중 만덕산 북쪽에 위치한 미륵사 주지를 만나 미륵사에서 겨울 한 철을 지내면서 부터다. 정산종사가 미륵사에서 화주인 최도화를 만난 후 정산종사가 미륵사를 떠나고 없자, 최도화는 정산종사를 찾아 봉래정사까지 왔다가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소태산 대종사는 만덕산 만덕암에서 최도화의 주선으로 원기 7년 말부터 3개월을 머물며 적공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9년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만덕산을 다시 찾아 몇몇 제자와 선(禪)을 나자, 최도화의 인도로 만덕산 아래 좌포에 사는 노덕송옥이 11살 된 장손자인 김대거(대산종사)를 데리고 귀의하였고, 서울에서 제자가 된 이동진화는 김삼매화와 함께 찾아왔다. 그리하여 경상도 성주의 송규(정산종사)와 영광의 오창건·김광선, 진안의 최도화·노덕송옥·김대거, 전주의 전삼삼·전음광·이청춘, 서울의 박사시화·이동진화·김삼매화 등 12명의 제자와 원기 9년 (음) 5월 한 달 동안 김광선의 주관으로 선(禪)을 났다. 이를 일러 원불교에서는 만덕산 초선회(初禪會)라 한다. 만덕산 만덕암은 소태산 대종사 → 정산종사 → 대산종사로 이어지는 원불교의 3대 주법(主法)이 최초로 만난 역사적인 곳이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칠산 유건 (七山 劉巾, 1880~1963)
칠산 유건 (七山 劉巾, 1880~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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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산 유건 종사 (七山 劉巾, 1880~1963) 원본코드 : WT1030251-000_031-2 복원날짜 : 원기 111년 1월 23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설명 : 스캔 사진을 AI를 활용하여 납자를 뺀 반신 사진으로 상반신 확장 복원한 사진이다. 인물설명 :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칠산 유건(七山 劉巾) 대호법은 1880년 11월 11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유호일(劉浩一) 선생과 모친 이씨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칠산 대호법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지혜와 용단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득도묘술(得道妙術)에만 발원하다가 결국 그것이 실없음을 깨닫고 32세 때에 그만 두었다. 소태산 대종사 깨달음을 이루자 소태산 대종사보다 11세나 연상이요, 외숙임에도 불구하고 칠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의 덕화에 감동하고 대도회상 창립취지에 찬동하여 제자 될 것을 서원하고 생질(甥姪)되는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여 사제지의를 맺었다. 처음에는 생질 되는 소태산 대종사를 ‘스승님’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하기도 하였지만 차차 신성이 깊어감에 따라 추호의 계교심 없이 독실한 신성으로 받들었다. 칠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 앞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꼭 ‘종사님’이라 불렀다. 혹 주위 사람들이 묻기를 “생질을 스승님으로 모시기가 어색하지 않느냐?”고 하면 “육신은 생질이지만 법은 지존(至尊)의 스승님이시다”고 하여 조그마한 일이라도 제자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칠산 대호법은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곤방(坤方)단원으로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기도 등 새 회상 창립에 공헌하였다. 법인성사를 이룬 후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건(巾), 법호는 칠산(七山)이며 본명은 성국(成國)이다. 칠산 대호법은 키가 크고 기상이 당당하며 특히 기력이 장하여 방언공사 때에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였고, 법인기도 때에도 가장 멀고 험한 기도봉을 다녔다. 원기 4년 (음) 3월 방언공사를 마친 후 준공기념비를 건립하려 했으나 돈이 없어 칠산 대호법의 발의로 자연석에 시멘트 판을 만들어 거기에다 소태산 대종사와 8인 단원의 이름과 공사의 시작과 마침을 새겼다. 새 회상 최초의 금석(金石) 기념물인 정관평(貞觀坪) 준공기념비 속칭 ‘방언조합 제명바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제명바위는 정관평 방언답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옥녀봉 동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가히 맨주먹으로 바다를 막아 그 거창한 사업을 이뤄놓은 조합원들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이 거창한 사업을 끝냈으니 그 기념으로 비석이나 하나 세워두자”는 의견을 내었고, 조합원 전원이 일제히 찬성, 소태산 대종사께 진언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러나 비석을 세울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칠산 대호법이 “저 바위에 양회(洋灰, 시멘트)를 바르고 거기에 제명을 해두면 백년은 갈 것 아니냐?”는 의견에 모두 찬성하여 그래서 제명바위가 만들어졌다. 방언공사와 법인기도를 마친 후 칠산 대호법은 전무출신의 길에 나서지 않고 영광 사가(소태산 대종사 탄생가)에 계속 머물면서 가사에 주력하며 거진출진(居塵出塵)으로서 새 회상 발전에 조력하며 32년간을 지냈다. 원기 42년 78세시에는 후진들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총부 옆 중앙수양원으로 와 만년 수양에 힘쓰다가 원기 48년 2월 22일, 83세로 9인 선진 가운데 마지막으로 열반하였다. 칠산 대호법이 열반하자 대산종사는 칠산 대호법의 심법상 위대한 점을 말했다. 첫째, 사가로 돌아간 후 아들이 병으로 누워있어 생활이 극도로 곤궁하였으나 땔나무하러 산에 다닐 때 남들은 다 교중(敎中) 산에서 나무를 베고 야단이지마는 칠산 대호법은 손자를 데리고 교중 산을 넘어 10리, 20리 다니며 땔나무 한 점이요. 둘째, 9인 선진이었으나 후진에게도 법으로 대하여 조금도 9인 선진 가운데 한 분이라는 상(相)이 없었던 점이요. 셋째, 영산 재 방언공사 때 품팔이와 땅 떼기를 하므로 “일은 그만 두고 감독만 하시더라도 노임을 드리겠으니 그리하시라”고 해도 “과거에 칠산이지, 지금도 칠산이냐”고 하면서 일체를 마다하고 그대로 손자와 땅 떼기 한 점 등이다. 그 어른의 회상을 위하는 마음과 심법이 이와 같았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육산 박동국 (六山 朴東局,1897~1950)
육산 박동국 (六山 朴東局,1897~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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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산 박동국 종사 원보코드 : W1000120I0081 복원시기 : 원기 111년 1월 23일 복원기관 : 원불교 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복원설명 : 원기 47년도 원불교역대사진첩 간행물에 실린 얼굴사진을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복원하였다. 인물정보 : 소태산 대종사 구인제자 중 한사람 후천개벽의 주세불이신 소태산 대종사의 친아우로서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동참했던 육산 박동국(六山 朴東局) 대호법은 1897년 1월 18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회산 박회경(晦山 朴晦傾) 대희사와 모친 정타원 유정천(定陀圓 劉定天) 대희사의 4남 2녀 중 사남으로 태어났다. 육산 대호법은 일찍이 한문사숙에서 수학하였으며, 당숙(堂叔)인 세규(世圭)에게 양자로 가서 가사에 조력하던 중 형이 깨달음을 얻자 제자가 되었다. 육산 대호법은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기품이 호협하고 용모는 형인 소태산 대종사와 닮았다.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이방(離方)단원으로 임명되어 저축조합운동, 방언공사, 법인기도 등에 동참하였다. 원기 4년 법인성사를 이룬 후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동국(東局), 법호는 육산(六山)이며 본명은 한석(漢碩)이다. 법인기도를 마친 후에도 육산 대호법은 정신·육신·물질로 대도회상 창립에 힘껏 노력하였고 영광읍 연성리에 살며 가정 사정으로 인하여 전무출신을 하지 못했다. 육산 대호법은 비록 재가에 머물러 지냈지만 양자로 간 상황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대신하여 모친을 직접 시봉했으며, 모친의 환후 중에는 형인 소태산 대종사를 대신하여 시탕함으로써 소태산 대종사가 안심하고 새 회상 창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여 공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 모친 시탕과 관련된 법문이 〈대종경〉 인도품 49장이 되었다. 대종사 봉래정사에서 모친 환후의 소식을 들으시고 급거히 영광 본가에 가시사 시탕하시다가 아우 동국에게 이르시기를 “도덕을 밝힌다는 나로서 모친의 병환을 어찌 불고하리요마는, 나의 현재 사정이 시탕을 마음껏 하지 못하게 된 것은 너도 아는바와 같이 나를 따라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 벌써 많은 수에 이르러 나 한 사람이 돌보지 아니하면 그들의 전도에 지장이 있을 것이요, 이제까지 하여 온 모든 사업도 큰 지장이 많을 것이니, 너는 나를 대신하여 모친 시탕을 정성껏 하라, 그러하면 나도 불효의 허물을 만일이라도 벗을 수 있을 것이요, 너도 이 사업에 큰 창립주가 될 것이다”하시고, 또한 모친에게 위로하시기를 “인간의 생사는 다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오니 모친께서는 안심하시고 항상 일심 청정의 진경에 주하시옵소서”하시고 강연히 그곳을 떠나 정사로 돌아오시어 제도사업에 전심하시니라. 육산 대호법은 그 후 계속하여 가사에 종사하다가 한국전쟁 때인 원기 35년 10월 4일, 54세로 영산에서 열반하였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정산 송규(鼎山 宋奎, 1900~1962)
정산 송규(鼎山 宋奎, 1900~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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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송규 종사 (鼎山 宋奎, 1900~1962) 복원날짜 : 원기 111년 1월 22일 복원기관 : 원불교 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본사진 : 정확한 날짜기록은 없으나 원기 28년 대종사 열반 전 후로 여겨진다. 생산설명 : 원본사진을 AI 활용하여 복원한 사진으로 사실연구에는 활용할 수 없습니다. 정산종사 십상 ① 하늘을 우러러 기원하신 앙천기원상(仰天祈願相) 큰 뜻을 품으시고 가야산으로 출발하실 즈음에 시 한수를 읊으시니 ‘해붕천리고상우(海鵬千里翶翔羽) 농학십년칩울신(籠鶴十年蟄鬱身) 바다붕새 천리나 되는 나래 가지고도 조롱 속에 10년이나 갇힌 학과 같이 답답하구나.’ 이 글을 장인 여병규가 보고 “아마도 자네는 나가서 큰 일 할 사람이지 집안 살림은 못 하겠네”하였다. ② 스승을 찾아 뜻을 이루신 심사해원상(尋師解願相) 가야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전라도로 행하시어 문득 대원사에 이르러서 진묵대사와 증산천사 등 전성(前聖)들의 법연을 갖던 중 우연히 화해리 해운 여 노인(女老人)의 알선으로 수삼 개월 화해리에서 지내시다가 대종사를 만나시었다. ③ 중앙으로 법을 이으신 중앙계법상(中央繼法相) 대종사 숙겁의 법연을 맞이하기 위하여 3년을 기다리시며 중앙을 비워놓았다가 정산종사를 앉히시고 ‘아심여심(我心汝心) 여심아심(汝心我心)이며 이젠 우리 회상의 일은 끝났다’하시고 만대 정법을 논의하시었다. ④ 봉래에서 교법제정을 도우신 봉래조법상(蓬萊助法相) 월명암에서 봉래정사를 왕래하시면서 제법하시는 대종사를 도와드리는 상수(上首)역할을 하시었다. ⑤ 초기교단의 교화인연을 맺어주신 초도교화상(初度敎化相) 익산총부를 건설하기 위하여 만덕산에 보내주신 대종사의 성지를 대행하시었다.(교단 교화 만대의 초선지를 정하심) ⑥ 개벽시대 주세불의 법을 이으신 개벽계성상(開闢繼聖相) 종법사위에 오르셔서 대종사를 새 세상의 주세불로 높이 받들며 불불계세(佛佛繼世) 성성상전(聖聖相傳) 심심상연(心心相連) 법법상법(法法相法)의 대임을 맡으시어 한 게(偈)를 읊으시니 ‘유위위무위(有爲爲無爲) 무상상고전(無相相固全) 망아진아현(忘我眞我現) 위공반자성(爲公反自成) 함 없음에 근원하여 함 있음을 이루게 되고, 상없는 자리에서 오롯한 상을 얻게 되며, 나를 잊은 자리에서 참된 나를 나타내고, 공을 위하는 데서 도리어 자기를 이루시니라.’(〈정산종사법어〉 무본편 33장) ⑦ 전란 중에도 교단을 쉼 없이 이끌어 주신 전란불휴상(戰亂不休相) 8.15 혼란과 한국전쟁을 당하여 재가출가 전 교도가 희생자 없이 무사히 회상을 이끌어 나오시었다. ⑧ 교서를 정비하신 교서정비상(敎書整備相) 회상성업을 계승하시는 가운데 7대교서 중 대종경과 6대교서 전반을 친감(親鑑)하시어 교단 만대의 전 교서를 정비하시고 교단 3대 사업인 교화·교육·자선기관을 설립하는 동시에 그 기초를 확립시켜 주시었다. ⑨ 9년 동안의 큰 병환 중에도 자비로 제중하신 치병제중상(治病濟衆相) 9년 대병(大病)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으시면서도 대종사의 일원대도를 시방세계에 전력하시려는 원력은 더욱 크시고 그 정성과 적공은 주소 일념뿐이시니 마음 한번 가라앉고 이마 한번 찡그리신 바 없으시어 그 성자(聖姿)와 그 성심(聖心)의 거룩하심에 만인이 흠망한 바가 크시었다. ⑩ 임인년에 열반하신 임인열반상(壬寅涅槃相) 열반하시기 직전에 게송을 전해주시니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 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는 인류의 대 윤리를 제창하시었다. 결어(結語) 송규는 정규의 지량으로 능히 측량할 사람이 아니로다. 내가 송규 형제를 만난 후 그들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한 일과 두 번 시켜본 일이 없나니라.(〈대종경〉 신성품 18장) ※ 정산종사 십상은 《대산종사법어(자문판)》제2부 법어 제1 신심편 45장과 대산종사 종법사 재위 중 정산종사 십상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주신 내용을 정리하였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오산 박세철 (五山 朴世喆,1879-1926)
오산 박세철 (五山 朴世喆,1879-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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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오산 박세철 종사 (五山 朴世喆,1879-1926) 복원날짜 : 원기110년 12월 31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사진용도 : 본 사진은 복원한 것으로 교화 활용 목적이며 인물 연구용으로는 활용할 수 없습니다. 인물정보 :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 오산 박세철(五山 朴世喆) 대봉도는 1879년 1월 16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박다여(朴多汝) 선생과 모친 노(盧)씨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에 당숙(堂叔)인 군서(君瑞)에게 양자로 간 후 농업에 종사하며 가정을 돌보던 중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이루자, 칠산 유건의 인도로 집안 아저씨 되는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와 사제지의를 맺고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손방(巽方)단원으로 임명 되었다. 원기 3년 방언공사가 시작되자, 오산 대봉도는 매양 선두에서 심혈을 다해 일하면서도 공은 언제나 타인에게 양보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덕화의 기운이 연하였고,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항상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종전에 병으로 신음하던 몸이 약을 쓰지 않고 완치가 되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오산 대봉도는 원기 4년 소태산 대종사의 지도로 8인 단원과 더불어 창생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였고, 마침내 생명희생의 대 서원을 올림으로써 천지신명이 감응하여 백지혈인을 나투었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세철(世喆), 법호가 오산(五山)이며 본명은 경문(京文)이다. 원기 4년 겨울 오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의 변산 행가 시 배종할 때 험한 산길에 고생이 심했으나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그 후 오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의 명에 의하여 영산으로 돌아와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의 수호책임을 맡아 정성을 다하였으며, 원기 6년 43세시에는 수년간 다소 저축하였던 금액 전부를 본교 기성조합에 희사하였다. 원기 10년 47세 되던 2월에는 우연히 내종병(內腫病)에 걸려 크게 위경을 맞았으나 양의(良醫)의 치료로 차효가 있음에 출가하기 좋은 시기라 생각하고 익산총부로 나와 전무출신 하였다. 원기 11년 소태산 대종사 사가가 전라북도 임실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이때 오산 대봉도는 팔산 김광선과 함께 가사 전반을 돌봐 주기도 하였으나 그해 6월부터 다시 전일의 병이 재발하여 그곳에서 한 달 가까이 신음하다가 7월에는 부득이 영산 자택으로 귀가하여 백방으로 치료에 노력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점점 병이 깊어졌다. 오산 대봉도는 자신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하고 자녀 손들을 불러 앉히고는 “나의 심신은 공중에 바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너희는 나를 사가 사람으로 알지 말고 사후에도 교중의 지시를 받아 초상절차도 신정예법에 의하여 집행하여 주기 바란다”고 유언하였다. 또한 임종을 지켜보는 정산종사와 삼산 김기천의 손을 꼭 잡고 비창(悲愴)한 어조로 “불초제(不肖弟)는 스승님과 형님들을 길이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하옵니다. 형님들께서는 부디 오래 사시어 공부사업을 잘 하시와 인도정의의 기초를 확립하시고 세계문명의 선구자가 되어 주시며, 불초제의 앞길을 선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최후를 부탁한 후 최초의 9인 제자 중 가장 먼저 원기 11년 9월 6일, 48세로 열반하였다. 오산 대봉도는 9인 제자 가운데 키가 제일 작았으며, 체질이 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큰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선량하고 겸양하여 무슨 일이나 하기 어려운 일은 스스로 담당하는 특성을 가졌다. 오산 대봉도는 언제나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앞장서고 도맡아서 스스로 한 일에 대해 조금도 장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무상도인 이었다. 방언공사 때에는 9인 제자 가운데 40세로 최고 연장자였으나 건강이 약하고 힘이 부족해 직접 흙짐을 짊어지기가 어려우므로 밥 심부름, 물 심부름을 비롯, 모든 잔심부름을 연하인 동지가 시키더라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그것이 방언공사 하는데 자신의 소임으로 알고했다. 당시 외부 인사들은 소태산 대종사의 9인 제자 중 오산 대봉도가 인물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제일 뒤떨어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그의 위대한 천품과 훌륭한 특징을 인정하여 오산 대봉도를 “어느 국왕이나 유명한 재상과도 바꾸지 않으며 조선총독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밖으로 나타난 외모야 당연히 저 조선총독보다 못하지만 안으로 상없는 마음과 그 희생적 보살행은 조선총독과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이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이산 이순순 (二山 李旬旬, 1879-1941)
이산 이순순 (二山 李旬旬, 1879-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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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이순순 종사 (二山 李旬旬, 1879-1941) 복원연도 : 원기 111년(2026) 1월 15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생산설명 : 인공지능으로 복원한 사진으로 교화 참고 자료용으로 활용할 수 있으나 사실 고증에는 사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인물설명 : 소태산 대종사의 첫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산 이순순(二山 李旬旬) 대호법은 1879년 9월 1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이다익(李多益) 선생과 모친 김씨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성이 호걸다워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가진 일면 온순 다정하기도 하였다. 키가 크고 기상이 늠름하며 성격이 활발하였던 이산 대호법은 창업기 교단에서 인화(人和)의 표본이 되었다. 이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이루기 전부터 이미 교분이 있었다. 32세 되던 해는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기 6년 전이었다. 이산 대호법은 이웃 마을에 살며 소태산 대종사의 외숙인 칠산 유건과의 친분으로 소태산 대종사가 세상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생활의 곤궁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께 민어 파시(波市)로 유명한 신안군 탈이섬으로 장사 떠날 것을 권하였다. 탈이섬은 법성포 앞바다인 칠산바다를 지나 남쪽에 위치한 임자도 곁에 붙어 있는 조그만 섬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구호동 가족들과 상의를 하고 이산 대호법에게 보리 석 섬을 빌려 장사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며칠 만에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달이 걸리는 장삿길 이었다. 그리하여 장사를 위해 배꾼들에게 필요한 물자며 그 동안 먹고 잘 살림도구도 장만하였다. 일행은 소태산 대종사와 이산 대호법, 칠산 유건, 그리고 밥을 해 주고 살림을 돌봐줄 사타원 이원화가 함께 갔다. 소태산 대종사는 탈이섬에서 뱃사람들에게 식량 등 물자를 대주고 잡아온 고기와 교환하여 판매하는 장사를 시작하였다. 희한하게도 어찌된 일인지 소태산 대종사에게서 양식과 물자를 가지고 바다로 나간 고깃배는 모두 다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고 고기를 가득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와 같이 석 달 정도 장사를 해 돈을 상당히 많이 벌었다. 그리하여 소태산 대종사는 부친이 남긴 부채를 청산하고 다시금 구도에 정진할 수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 깨달음을 얻기 전, 입정 당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노루목 초가집이 지붕나래가 걷어져 방에 비가 새어 소태산 대종사의 온 몸이 흠뻑 적셔지는 사태가 발생 하였어도 아무것도 모르고 입정에 들어 있을 때 이산 대호법이 노루목으로 달려가 지붕나래를 고쳐 주었다. 이와 같이 교분을 갖고 내왕하던 이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자 같은 마을 삼산 김기천의 인도로 12살이나 연하인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산 대호법은 원기 2년 (음) 7월 26일 교단의 최초 통치단인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감방(坎方)단원으로 임명되어 허례폐지와 미신타파, 금주단연 등으로 저축조합의 자금조성에 심혈을 다하였다. 원기 3년 (음) 4월 간석지 방언공사가 시작 되었을 때 이산 대호법은 동지들과 함께 흙짐을 저 나르고 삽질을 하는 등 온갖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일호의 사심 없이 모든 난관을 감수하며 정성을 다 바쳤다. 또한 이산 대호법은 원기 4년 (음) 3월 26일부터 소태산 대종사의 지도를 받으며 단원들과 함께 창생을 구원할 새 회상 창립을 위하여 혈심으로 기도하였고 마침내 사무여한의 대 서원을 올림으로써 천지신명의 감응을 얻어 백지혈인을 나투었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세계 공명으로 봉수 받은 법명이 순순(旬旬), 법호는 이산(二山)이며 본명은 인명(仁明)이다. 그 후 이산 대호법은 전무출신을 단행하지는 못했으나 거진출진으로 회상의 발전에 협력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총부에서 영산에 내려갔다가 이산 대호법에게 정정(定靜)을 얻는 외정정과 내정정의 두 가지 길과 관련해 재가공부(在家工夫)하는 법을 지도하였다. 재가로서 영광 천정리에서 생활하면서 교단발전에 정성을 다하던 이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 28년에 열반하자 총부로 달려와 스승을 잃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최초 9인 제자 중 생존해 있는 동지들과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산 대호법은 원기 30년 11월 28일, 67세로 영광 천정리 자택에서 열반하였다. <2009,원불교기초이해>

팔산 김광선 (八山 金光旋,1879~1939)
팔산 김광선 (八山 金光旋,1879~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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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산 김광선 종사 (八山 金光旋,1879~1939) 복원연도 : 원기 111년(2026)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본코드 : WT1020007-000_041 인물설명 : 소태산 대종사의 구인제자 중 한사람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이며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팔산 김광선(八山 金光旋) 대봉도는 1879년 9월 6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김응오(金應五) 선생과 모친 강씨(姜氏)의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숙부 응칠(應七)에게 양자로가 양모인 조연풍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팔산 대봉도는 10세 때부터 한문사숙하고, 17세 때에는 길룡리 와탄천 건너 마촌(馬村) 산중에 들어가 천막을 치고 주문과 심축을 드리며 1년 동안 음양복술 공부를 하였다. 18세부터 가계를 돕기 위하여 농사도 짓고 혹은 상업도 경영하였으며, 31세부터 3년간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 문중의 대동보를 꾸미었다. 팔산 대봉도는 세상 모르고 입정삼매에 있는 소태산 대종사의 지극히 간구한 생활을 보고 우연히 남다른 동정심이 발하여 가끔 찾아가 식사도 제공하는 등 물질적 살림을 보조하였다. 또한 공부하는 비용을 후원하여 고창 연화봉 등을 동반하며 공부하기도 하였다. 팔산 대봉도가 38세 되던 해에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어 그 동안 피골상접(皮骨相接)하던 몸이 다시 혈육 충만하고 용모의 모습이 일월같이 명랑 원만해 지는 것을 접하고 심중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리하여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12살 아래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가 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와 사제지의를 맺은 이후로는 수도생활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세상사를 청산하기 위하여 채무자에게 수금할 3천여 원의 채권증서를 스스로 모두 소각해 버린 후 빌려준 돈도 전부 탕감해 주어 놀라게 하였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후 종종 허물없는 팔산 대봉도를 불러 ‘붓을 잡으라’ 명하여 친히 문구(文句)와 시가(詩歌) 등을 불러주며 수필편집(受筆編集)을 하게 하였다. 그 책이 《법의대전(法義大全)》, 《백일소(白日蕭)》, 《심적편(心迹篇)》 등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후일 “그 책들로 말하면 일시적 발심조흥(發心助興)은 될지언정 사람들을 지도하는 정식 교과서는 못될 것”이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뜻에 따라 소각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태방(兌方)단원으로 임명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방언공사 당시에 키가 크고 건강한 몸으로 8인 단원 중 으뜸가는 기력을 가졌고 가정 형편도 제일 넉넉한 편이어서 정신․육신․물질 삼방면으로 솔선수범하였다. 어느 때에는 제방에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막으려고 애를 태우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인력으로 저 구멍을 막지 못한다면 내 육신으로 막겠노라’하고 사지(死地)를 평지(平地)같이 뛰어들어 막았다. 팔산 대봉도는 방언공사를 마친 후 법인기도에 동참, 법인성사를 이루고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광선(光旋), 법호는 팔산(八山)이며 본명은 성섭(成燮)이다. 이어 원기 8년까지 방언답을 관리하며 영산성지의 일을 돌보면서 공사에 힘쓰던 중 당시 소태산 대종사와 백학명 선사의 뜻에 따라 정읍 내장사에 가서 잠시 머문 것이 본격적인 출가수도가 되었다. 원기 9년 46세에는 이리 송학리 박원석의 집에서 사산 오창건·도산 이동안 등과 더불어 농사를 지었고, 익산총부 건설 당시 엿 장사 등을 하였으며, 원기 10년에는 농업부의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원기 17년에는 마령교당 교무로 부임하여 창설초의 빈한한 교당이라 유지대책이 없었다. 팔산 대봉도는 부임하여 주경야독으로 바로 교리훈련을 시키는 한편 친히 전답개간, 수박재배, 과수원 경영 등에 노력을 기울여 근무 3년 만에 논 4두락을 매입하여 마령교당의 토대를 세우는가 하면 선진농법을 지역사회에 전했다. 팔산 대봉도는 원기 22년 4월, 59세시에 우연히 소화불량증으로 건강이 좋지 못하여 부득이 원평교당 교무를 사임하고 익산총부로 귀관하여 잠시 휴양하며 치료에 전력하였다. 그해 8월 교단 정기간행물인 〈회보(會報)〉에 ‘학이불능(學而不能)’이라는 글을 발표,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를 높이 찬양하였다. 학이불능의 내용은 팔산 대봉도가 옛날 증자의 문하생인 공명선의 배움의 태도에 관한 《소학(小學)》의 일절을 인용한 후 소태산 대종사의 위대한 점을 ① 순일하신 공심 ② 일관하신 성의 ③ 위대하신 포용력 등 3가지로 요약하였다. 원기 23년, 60세시에는 총부 순교무로 임명을 받아 각지를 순회하다 영산교당에 내려갔다. 그러나 7월부터 병이 재발하여 그곳 동지들과 가족들이 온갖 정성을 다 바쳐 노력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원기 24년 2월 21일, 영산교당에서 61세로 열반하였다. 중앙총부에서 팔산 대봉도의 열반 소식을 접한 소태산 대종사는 눈물을 보이며 비통해 하는 가운데 대각전에서 열반식을 거행케 한 후 법상에 올라 팔산 대봉도의 영혼천도를 위하여 ‘생사거래와 업보멸도’란 내용의 법문(〈대종경〉 천도품 28장)을 설했다. <2004,원불교기초이해>

사산 오창건 (四山 吳昌建, 1889~1953)
사산 오창건 (四山 吳昌建, 1889~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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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오창건 종사 (四山 吳昌建, 1889~1953) 복원연도 : 원기 111년(2026)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본코드 : WT1030151-000_018 인물정보 : 소태산 대종사 구인제자 중 한사람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산 오창건(四山 吳昌建) 대봉도는 교단 창업기 공심의 표준적 인물이었다. 방언공사 중 흙을 져 나르고 떼 짐을 지는 등 고된 일로 힘이 들어도 소태산 대종사가 “자 시작하자”하면 맨 먼저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사산 대봉도였다. 사산 대봉도는 공중사라면 자신의 신명을 아끼지 않았고 공금을 지극히 아끼었으며, 소태산 대종사의 경제적 보좌 역할을 한 혈심제자였다. 사산 대봉도는 1887년 10월 17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학산리에서 부친 오윤안(吳允安) 선생과 모친 김중풍(金中風) 여사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불교를 믿어 왔으며 특히 부친은 불심이 장하여 동네 근방에 있는 대절산에 초당을 지어 수양을 하기도 하였다. 사산 대봉도는 12세시에 한문사숙에 입학하여 4,5년간 수학하였고, 성년이 되어서는 약간의 전수받은 재산으로 가사에 전력하면서 당시 일대에 만연되어 오던 태을교(太乙敎)에 뜻을 두고 열심히 신봉하였다. 사산 대봉도는 일찍이 소태산 대종사와 십 여리 떨어진 마을에 살았으므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자 팔산 김광선에게 소식을 듣고 스스로 찾아와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기 2년 (음) 7월 소태산 대종사가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사산 대봉도는 진방(震方)단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석 중이던 중앙단원의 대리임무도 맡아 절약절식, 금주단연, 주경야독으로 교단 초창의 기초사업에 혈심혈성을 기울였다. 원기 3년 32세시에는 방언공사와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 건축에 단원들과 힘을 합쳐 힘든 흙 지게를 기쁘게 졌다. 원기 4년에는 8인 단원들과 함께 창생을 위한 정성스런 기도로 마침내 백지혈인의 법인성사를 나투어 이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창건(昌建), 법호는 사산(四山)이며 본명은 재겸(在謙)이다. 사산 대봉도는 원기 4년 (음) 3월 소태산 대종사가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휴양처를 물색하기 위해 변산 월명암에 1차로가 10여 일 머물 때 모시고 갔으며, 그해 (음) 10월, 변산에 입산할 때에도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가 정산종사와 함께 월명암 옆 쌍선봉(雙仙峰)에서 법인기도를 해제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변산, 만덕산, 내장산 등을 다니는 때에는 항상 사산 대봉도가 멀고 험한 길을 막론하고 식량을 지고 다니며 시봉하였다. 사산 대봉도는 키가 크고 기골이 호걸다웠고 기력이 장하였으며, 모습이 소태산 대종사와 비슷하여 뒤에서 얼핏 보면 소태산 대종사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아 ‘작은 대종사’라고도 불리웠으며, 소태산 대종사의 의복이 몸에 맞아 물려받아 입기도 했다. 사산 대봉도는 천성이 쾌활 인자하고 다정다감하여 사람을 대함에 감화력이 풍부하였다. 그리하여 전무출신 남녀 동지들은 마치 세정을 잘 아는 어머니와 같이 따르고 심지어 여자동지들은 사산 대봉도를 ‘언니’라 부르며 국한 없이 따랐다. 사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를 가까이서 시봉하였기 때문에 소태산 대종사의 교중사(敎中事) 감독하는 것을 많이 보아 그 처사법을 따라 교중사 감독에 능하였다. 그중에서도 건축 감독을 많이 하여 지방교당을 건축할 때는 사산 대봉도가 주로 감독하였다. 특히 서울교당 건축 시에는 몸소 노동일을 하였으며, 초량교당 건축 시에는 폭풍우 속에서 밤을 세워가며 교당을 지켰다. 원기 18년에 사산 대봉도가 서울교당 건축위원으로 상경하였고, 얼마 후에는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였다. 서울교당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소태산 대종사 서울교당 교무인 이완철에게 짐을 지고 서울역까지 가자하였다. 이완철이 “제가 지금 교당 수축관계로 십여 명의 인부를 부리고 있을뿐더러 교무의 위신상으로도 난처하나이다.”하니 소태산 대종사 그 짐을 사산 대봉도에게 지우시고 다녀왔다. 사산 대봉도는 한번 소태산 대종사께 바친 신심은 일호의 사심이 없었으며, 서있는 곳이 비록 진흙땅이라 하더라도 소태산 대종사를 뵈옵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로 엎드려 지극히 공손한 예를 올렸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원기 33년에 사산 대봉도의 발기로 변산 석두암을 중수하고 어느 날 후배 동지들과 함께 찾았다. 봉래정사 어귀에 이르자 사산 대봉도가 “종사님! 종사님! 창건이가 왔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동행하던 후진들은 사산 대봉도를 통하여 자신들의 신성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산 대봉도는 영산 서무부장, 총부 서무부장 등을 오래 맡아 초창기 어려운 교단 살림을 알뜰히 보살폈으며, 전주·원평교당 교무로 일선교화에도 참여하였고 총부 예감·감찰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28년간 총부, 영광, 원평 등지에서 교단창업에 헌신하였다. 공사를 위해 몸을 잊은 무서운 공심가요, 향내 나는 전무출신이었던 사산 대봉도는 원기 38년 1월 23일, 66세로 열반하였다.<2004,원불교기초이해>

일산 이재철(一山 李載喆, 1891-1943)
일산 이재철(一山 李載喆, 1891-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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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이재철 종사 (一山 李載喆, 1891-1943) 복원연도 : 원기111년(2026)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본코드 : W1010329A0057 인물설명: 소태산 대종사의 첫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일산 이재철(一山 李載喆) 대봉도는 외교가 능하여 초기교단의 대외 간판 역할을 하였다.방언공사 시 허가 분쟁이 일어나 큰 곤경에 처했을 때 군청에 출입하는 등 뛰어난 식견과 언변으로 동분서주하며 위기를 면하게 하였으며, 익산총부를 건설할 때도 외교로 경제적 토대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일산 대봉도는 1891년 2월 11일,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학정리에서 부친 이관현(李寬現) 선생과 모친 옥타원 김화옥(玉陀圓 金華玉) 여사의 4남매 중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함평·영광지역의 동학 접주(接主)로서 농민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으며, 모친은 소태산 대종사 법하에 귀의하여서 독실한 신심으로 수행에 적공하여 선력(禪力)을 인증 받기도 했다. 일산 대봉도는 원기 원년(1916) 4월, 사산 오창건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뵙고 장차 교단 창설의 취지를 듣자 매우 기뻐하며 즉석에서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후 비몽사몽간에 본 경전이 〈금강경〉이었다. 일산 대봉도는 원기 원년 5월, 소태산 대종사의 명을 받들고 불갑사(佛甲寺)에 가서 금강경을 구해드렸다. 그 후로 일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의 대도를 봉대하는 마음이 날로 간절해지는 가운데 원기 2년 (음) 7월 26일, 교단의 최초 통치단인 남자 정수위단(男子正首位團)을 조직할 때에 건방(乾方)단원으로 임명되어 조합의 규정을 성실하게 수행함과 아울러 교단사업의 기초를 다지는데 헌신 노력했다. 저축조합 초기의 경제관계 사무뿐만 아니라 간석지 방언공사와 구간도실 건축에 온갖 정성과 혈심을 기울였을 때 일산 대봉도는 주로 외무일과 금전출납 관계 사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소태산 대종사의 직접 지휘를 받으며 동지들과 더불어 흙짐을 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발바닥이 부르트고 어깨와 등이 부어올라 사뭇 못 견딜 지경이었다. 차라리 귀한 집 독자가 아니었다면 진작 흙짐 지는 연습이라도 해두었을 것을 하는 후회도 했다. 일산 대봉도는 원기 4년 (음) 3월 26일부터 소태산 대종사의 지도를 받아 8인 단원들과 함께 창생의 구원을 위하여 혈심으로 기도하였다. 법인기도 시 소태산 대종사가 단원들에게 “생사는 인간대사라, 만일 조금이라도 자신이나 가정은 물론하고 걱정스런 생각이 있거든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했을 때 효성이 남달리 장했던 일산 대봉도는 “창생을 위하여 자신 한 몸 죽는 것은 여한이 없으나 홀로 계신 모친이 걱정됩니다”고 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일산 대봉도의 심중을 헤아리고 “모친의 시봉은 내가 책임질 테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명희생의 결심을 굳게 하였으며, 기도 마지막 날에는 환후 중인 모친에게 한약을 지어 인편에 전하기도 했다. (음) 7월 26일(8.21) 마침내 생명희생의 대 서원을 올림으로써 천지신명의 감명을 얻어 백지혈인(白指血印)의 이적을 나투었다. 이때에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재철(載喆), 법호는 일산(一山)이며 본명은 재풍(載馮)이다. 일산 대봉도는 키가 크고 신상이 구족하며 위풍이 좋은 가운데 천성이 온순하여 누구를 대하나 항상 화기(和氣)롭고 겸손하였다. 영광지방에서는 이러한 일산 대봉도에 대해 ‘영광의 인물’ 이라는 평을 하며 ‘봉사가 만져 봐도 양반’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성격을 지닌 일산 대봉도는 아랫사람들의 세정을 일일이 살펴주었고 항상 용기와 희망을 넣어주었다. 그래서 후진들이 일산 대봉도를 대하면 어딘가 모르게 다정다감하여 친 부모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또한 일산 대봉도는 무슨 일이든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절대로 여러 사람 앞에서 꾸중하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조용히 타이르고 자상히 가르쳐 주었다. 일산 대봉도는 언제나 소태산 대종사 앞에서는 손을 내려놓은 일이 없고 겸허한 태도로 공수(珙手)를 하며 물러날 때에도 그냥 뒤돌아서는 일이 없이 진퇴의 예를 갖추어서 행했다. 일산 대봉도는 심기(心氣)가 상통한 팔촌 동생인 도산 이동안을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시켰다. 바로 이것이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함평 이씨 가문이 이 회상에 귀의하고 가문에서 수십 명이 전무출신하여 교단의 창립과 발전에 공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8인 단원과 함께 모든 어려움을 개척해가며 저축조합·방언공사·혈인기도 등을 마친 일산 대봉도는 출가 후 23여 년간을 영광 혹은 총부에서 교단 사업계의 중책을 맡아 초기교단의 경제적 기초를 다지는데 크게 기여 하였고, 원기 20년대에는 총부 서정 전반(庶政 全般)에 걸쳐 오직 교단발전을 위해 헌신 봉공하였다. 일산 대봉도는 영광군 백수면 천마리 자택에서 숙환으로 원기 28년 11월 15일, 53세로 열반하였다. 일산 대봉도는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와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열반하였다. <2009,원불교기초이해>

삼산 김기천(三山 金幾千, 1890~1935)
삼산 김기천(三山 金幾千, 1890~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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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 김기천 종사 (三山 金幾千, 1890~1935) 복원연도 : 원기111년(2026)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본코드 : WT1020007-000_039 인물설명 : 삼산 김기천(三山 金幾千, 1890~1935)은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지혜·수양·계행이 뛰어나 소태산으로부터 “희로애락에 끌리지 않는 부처”라는 극찬을 받은 인물이다. 주요 생애와 활동 출생: 1890년 전남 영광 백수면 천정리 학문과 초기 활동: 한문에 밝아 17세에 서당 훈장, 소태산과는 대각 이전부터 인연 입교: 팔산 김광선의 인도로 소태산에게 귀의, 법명 ‘기천’, 법호 ‘삼산’ 초기 교단 활동: 남자 정수위단 간방 단원 저축조합·방언공사·법인기도 등 창립 사업 적극 참여 영광지부·익산총부에서 서무부장, 총부 교무부장, 총부선원 교무 등 역임 견성인가 원기 13년(39세), 소태산이 제자들에게 성리를 물을 때 유일하게 끝까지 답해 소태산이 크게 기뻐하며 새 회상 최초의 견성인가를 삼산에게 수여 대중의 박수와 환호 속에 ‘견성도인’으로 추앙받음. 저술 및 교화 활동 《철자집》 저술, 가사조 글 발표 ‘교리송’, ‘사은 찬송가’, ‘심월송’ 등 교리 시가 창작 원기 17년 부산 하단교당 초대 교무로 부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교화를 확장 남부민교당 설립 야학 운영으로 지역 문맹 퇴치에 기여

원기 47년 중앙총부사무소
원기 47년 중앙총부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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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47년 역대기념사진첩에 실린 중앙총부사무소 복원 사진으로 현재 이 건물을 익산성지 구정원이라 부른다. 2차생산 : 원기 110년 12월 26일 원불교 기록관리소 원본 기록물 제목 : 원불교역대기념사진첩 원본 등록코드 : A1000922P0073 / W1000120I0081 구정원 : 원불교 교단 초기에 교단행정을 수행하던 건물. 원불교 중앙총부에 있는 건물. 구정원은 재미교포 신영기(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 출신)가 귀국하여 지은 4간 겹집 와가이다. 1937년(원기22) 그가 전북 이리농림학교 근처로 이사 가면서 희사했다. 백백교 사건으로 일제가 신흥종교의 남녀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자, 부인선원(도치원) 뒤에 있는 조실(금강원)을 영춘헌(迎春軒)으로 옮기고, 영춘헌의 사무실은 신영기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1964년(원기49) 8월까지 27년간 교정원 사무실로 이용했다. ‘구교정원’이란 말을 약칭하여 ‘구정원’이라 부르게 되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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