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오창건 (四山 吳昌建, 1889~1953) 인물

전체공개
고대진 | 2026-01-06 13:24
69 | 17
사산 오창건 (四山 吳昌建, 1889~1953)
해상도
1696 x 2528 px
파일 크기
6.49 MB
파일 형식
PNG
사산 오창건 종사 (四山 吳昌建, 1889~1953)
복원연도 : 원기 111년(2026)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본코드 : WT1030151-000_018
인물정보 : 소태산 대종사 구인제자 중 한사람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산 오창건(四山 吳昌建) 대봉도는 교단 창업기 공심의 표준적 인물이었다. 방언공사 중 흙을 져 나르고 떼 짐을 지는 등 고된 일로 힘이 들어도 소태산 대종사가 “자 시작하자”하면 맨 먼저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사산 대봉도였다.
사산 대봉도는 공중사라면 자신의 신명을 아끼지 않았고 공금을 지극히 아끼었으며, 소태산 대종사의 경제적 보좌 역할을 한 혈심제자였다.
사산 대봉도는 1887년 10월 17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학산리에서 부친 오윤안(吳允安) 선생과 모친 김중풍(金中風) 여사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불교를 믿어 왔으며 특히 부친은 불심이 장하여 동네 근방에 있는 대절산에 초당을 지어 수양을 하기도 하였다.
사산 대봉도는 12세시에 한문사숙에 입학하여 4,5년간 수학하였고, 성년이 되어서는 약간의 전수받은 재산으로 가사에 전력하면서 당시 일대에 만연되어 오던 태을교(太乙敎)에 뜻을 두고 열심히 신봉하였다.
사산 대봉도는 일찍이 소태산 대종사와 십 여리 떨어진 마을에 살았으므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자 팔산 김광선에게 소식을 듣고 스스로 찾아와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기 2년 (음) 7월 소태산 대종사가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사산 대봉도는 진방(震方)단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석 중이던 중앙단원의 대리임무도 맡아 절약절식, 금주단연, 주경야독으로 교단 초창의 기초사업에 혈심혈성을 기울였다.
원기 3년 32세시에는 방언공사와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 건축에 단원들과 힘을 합쳐 힘든 흙 지게를 기쁘게 졌다.
원기 4년에는 8인 단원들과 함께 창생을 위한 정성스런 기도로 마침내 백지혈인의 법인성사를 나투어 이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창건(昌建), 법호는 사산(四山)이며 본명은 재겸(在謙)이다.
사산 대봉도는 원기 4년 (음) 3월 소태산 대종사가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휴양처를 물색하기 위해 변산 월명암에 1차로가 10여 일 머물 때 모시고 갔으며, 그해 (음) 10월, 변산에 입산할 때에도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가 정산종사와 함께 월명암 옆 쌍선봉(雙仙峰)에서 법인기도를 해제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변산, 만덕산, 내장산 등을 다니는 때에는 항상 사산 대봉도가 멀고 험한 길을 막론하고 식량을 지고 다니며 시봉하였다.
사산 대봉도는 키가 크고 기골이 호걸다웠고 기력이 장하였으며, 모습이 소태산 대종사와 비슷하여 뒤에서 얼핏 보면 소태산 대종사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아 ‘작은 대종사’라고도 불리웠으며, 소태산 대종사의 의복이 몸에 맞아 물려받아 입기도 했다.
사산 대봉도는 천성이 쾌활 인자하고 다정다감하여 사람을 대함에 감화력이 풍부하였다. 그리하여 전무출신 남녀 동지들은 마치 세정을 잘 아는 어머니와 같이 따르고 심지어 여자동지들은 사산 대봉도를 ‘언니’라 부르며 국한 없이 따랐다.
사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를 가까이서 시봉하였기 때문에 소태산 대종사의 교중사(敎中事) 감독하는 것을 많이 보아 그 처사법을 따라 교중사 감독에 능하였다.
그중에서도 건축 감독을 많이 하여 지방교당을 건축할 때는 사산 대봉도가 주로 감독하였다. 특히 서울교당 건축 시에는 몸소 노동일을 하였으며, 초량교당 건축 시에는 폭풍우 속에서 밤을 세워가며 교당을 지켰다.
원기 18년에 사산 대봉도가 서울교당 건축위원으로 상경하였고, 얼마 후에는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였다. 서울교당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소태산 대종사 서울교당 교무인 이완철에게 짐을 지고 서울역까지 가자하였다.
이완철이 “제가 지금 교당 수축관계로 십여 명의 인부를 부리고 있을뿐더러 교무의 위신상으로도 난처하나이다.”하니 소태산 대종사 그 짐을 사산 대봉도에게 지우시고 다녀왔다.
사산 대봉도는 한번 소태산 대종사께 바친 신심은 일호의 사심이 없었으며, 서있는 곳이 비록 진흙땅이라 하더라도 소태산 대종사를 뵈옵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로 엎드려 지극히 공손한 예를 올렸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원기 33년에 사산 대봉도의 발기로 변산 석두암을 중수하고 어느 날 후배 동지들과 함께 찾았다.
봉래정사 어귀에 이르자 사산 대봉도가 “종사님! 종사님! 창건이가 왔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동행하던 후진들은 사산 대봉도를 통하여 자신들의 신성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산 대봉도는 영산 서무부장, 총부 서무부장 등을 오래 맡아 초창기 어려운 교단 살림을 알뜰히 보살폈으며, 전주·원평교당 교무로 일선교화에도 참여하였고 총부 예감·감찰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28년간 총부, 영광, 원평 등지에서 교단창업에 헌신하였다.
공사를 위해 몸을 잊은 무서운 공심가요, 향내 나는 전무출신이었던 사산 대봉도는 원기 38년 1월 23일, 66세로 열반하였다.<2004,원불교기초이해>

자료 검색 봇
안녕하세요! 원불교 기록관리소 검색 봇입니다.
찾으시는 자료의 키워드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