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산 유건 (七山 劉巾, 1880~1963) 인물

전체공개
고대진 | 2026-01-23 08:59
91 | 16
칠산 유건 (七山 劉巾, 1880~1963)
해상도
1856 x 2304 px
파일 크기
6.18 MB
파일 형식
PNG
칠산 유건 종사 (七山 劉巾, 1880~1963)
원본코드 : WT1030251-000_031-2
복원날짜 : 원기 111년 1월 23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설명 : 스캔 사진을 AI를 활용하여 납자를 뺀 반신 사진으로 상반신 확장 복원한 사진이다.

인물설명 :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칠산 유건(七山 劉巾) 대호법은 1880년 11월 11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유호일(劉浩一) 선생과 모친 이씨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칠산 대호법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지혜와 용단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득도묘술(得道妙術)에만 발원하다가 결국 그것이 실없음을 깨닫고 32세 때에 그만 두었다.
소태산 대종사 깨달음을 이루자 소태산 대종사보다 11세나 연상이요, 외숙임에도 불구하고 칠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의 덕화에 감동하고 대도회상 창립취지에 찬동하여 제자 될 것을 서원하고 생질(甥姪)되는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여 사제지의를 맺었다.
처음에는 생질 되는 소태산 대종사를 ‘스승님’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하기도 하였지만 차차 신성이 깊어감에 따라 추호의 계교심 없이 독실한 신성으로 받들었다.
칠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 앞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꼭 ‘종사님’이라 불렀다. 혹 주위 사람들이 묻기를 “생질을 스승님으로 모시기가 어색하지 않느냐?”고 하면 “육신은 생질이지만 법은 지존(至尊)의 스승님이시다”고 하여 조그마한 일이라도 제자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칠산 대호법은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곤방(坤方)단원으로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기도 등 새 회상 창립에 공헌하였다.
법인성사를 이룬 후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건(巾), 법호는 칠산(七山)이며 본명은 성국(成國)이다.
칠산 대호법은 키가 크고 기상이 당당하며 특히 기력이 장하여 방언공사 때에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였고, 법인기도 때에도 가장 멀고 험한 기도봉을 다녔다.
원기 4년 (음) 3월 방언공사를 마친 후 준공기념비를 건립하려 했으나 돈이 없어 칠산 대호법의 발의로 자연석에 시멘트 판을 만들어 거기에다 소태산 대종사와 8인 단원의 이름과 공사의 시작과 마침을 새겼다.
새 회상 최초의 금석(金石) 기념물인 정관평(貞觀坪) 준공기념비 속칭 ‘방언조합 제명바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제명바위는 정관평 방언답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옥녀봉 동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가히 맨주먹으로 바다를 막아 그 거창한 사업을 이뤄놓은 조합원들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이 거창한 사업을 끝냈으니 그 기념으로 비석이나 하나 세워두자”는 의견을 내었고, 조합원 전원이 일제히 찬성, 소태산 대종사께 진언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러나 비석을 세울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칠산 대호법이 “저 바위에 양회(洋灰, 시멘트)를 바르고 거기에 제명을 해두면 백년은 갈 것 아니냐?”는 의견에 모두 찬성하여 그래서 제명바위가 만들어졌다.
방언공사와 법인기도를 마친 후 칠산 대호법은 전무출신의 길에 나서지 않고 영광 사가(소태산 대종사 탄생가)에 계속 머물면서 가사에 주력하며 거진출진(居塵出塵)으로서 새 회상 발전에 조력하며 32년간을 지냈다. 원기 42년 78세시에는 후진들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총부 옆 중앙수양원으로 와 만년 수양에 힘쓰다가 원기 48년 2월 22일, 83세로 9인 선진 가운데 마지막으로 열반하였다.
칠산 대호법이 열반하자 대산종사는 칠산 대호법의 심법상 위대한 점을 말했다.

첫째, 사가로 돌아간 후 아들이 병으로 누워있어 생활이 극도로 곤궁하였으나 땔나무하러 산에 다닐 때 남들은 다 교중(敎中) 산에서 나무를 베고 야단이지마는 칠산 대호법은 손자를 데리고 교중 산을 넘어 10리, 20리 다니며 땔나무 한 점이요.
둘째, 9인 선진이었으나 후진에게도 법으로 대하여 조금도 9인 선진 가운데 한 분이라는 상(相)이 없었던 점이요.
셋째, 영산 재 방언공사 때 품팔이와 땅 떼기를 하므로 “일은 그만 두고 감독만 하시더라도 노임을 드리겠으니 그리하시라”고 해도 “과거에 칠산이지, 지금도 칠산이냐”고 하면서 일체를 마다하고 그대로 손자와 땅 떼기 한 점 등이다. 그 어른의 회상을 위하는 마음과 심법이 이와 같았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자료 검색 봇
안녕하세요! 원불교 기록관리소 검색 봇입니다.
찾으시는 자료의 키워드를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