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산 김광선 (八山 金光旋,1879~1939)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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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 2026-01-0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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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산 김광선 (八山 金光旋,1879~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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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산 김광선 종사 (八山 金光旋,1879~1939)
복원연도 : 원기 111년(2026)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본코드 : WT1020007-000_041
인물설명 : 소태산 대종사의 구인제자 중 한사람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이며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팔산 김광선(八山 金光旋) 대봉도는 1879년 9월 6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김응오(金應五) 선생과 모친 강씨(姜氏)의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숙부 응칠(應七)에게 양자로가 양모인 조연풍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팔산 대봉도는 10세 때부터 한문사숙하고, 17세 때에는 길룡리 와탄천 건너 마촌(馬村) 산중에 들어가 천막을 치고 주문과 심축을 드리며 1년 동안 음양복술 공부를 하였다.
18세부터 가계를 돕기 위하여 농사도 짓고 혹은 상업도 경영하였으며, 31세부터 3년간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 문중의 대동보를 꾸미었다.
팔산 대봉도는 세상 모르고 입정삼매에 있는 소태산 대종사의 지극히 간구한 생활을 보고 우연히 남다른 동정심이 발하여 가끔 찾아가 식사도 제공하는 등 물질적 살림을 보조하였다. 또한 공부하는 비용을 후원하여 고창 연화봉 등을 동반하며 공부하기도 하였다.
팔산 대봉도가 38세 되던 해에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어 그 동안 피골상접(皮骨相接)하던 몸이 다시 혈육 충만하고 용모의 모습이 일월같이 명랑 원만해 지는 것을 접하고 심중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리하여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12살 아래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가 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와 사제지의를 맺은 이후로는 수도생활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세상사를 청산하기 위하여 채무자에게 수금할 3천여 원의 채권증서를 스스로 모두 소각해 버린 후 빌려준 돈도 전부 탕감해 주어 놀라게 하였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후 종종 허물없는 팔산 대봉도를 불러 ‘붓을 잡으라’ 명하여 친히 문구(文句)와 시가(詩歌) 등을 불러주며 수필편집(受筆編集)을 하게 하였다. 그 책이 《법의대전(法義大全)》, 《백일소(白日蕭)》, 《심적편(心迹篇)》 등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후일 “그 책들로 말하면 일시적 발심조흥(發心助興)은 될지언정 사람들을 지도하는 정식 교과서는 못될 것”이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뜻에 따라 소각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태방(兌方)단원으로 임명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방언공사 당시에 키가 크고 건강한 몸으로 8인 단원 중 으뜸가는 기력을 가졌고 가정 형편도 제일 넉넉한 편이어서 정신․육신․물질 삼방면으로 솔선수범하였다.
어느 때에는 제방에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막으려고 애를 태우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인력으로 저 구멍을 막지 못한다면 내 육신으로 막겠노라’하고 사지(死地)를 평지(平地)같이 뛰어들어 막았다.
팔산 대봉도는 방언공사를 마친 후 법인기도에 동참, 법인성사를 이루고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광선(光旋), 법호는 팔산(八山)이며 본명은 성섭(成燮)이다.
이어 원기 8년까지 방언답을 관리하며 영산성지의 일을 돌보면서 공사에 힘쓰던 중 당시 소태산 대종사와 백학명 선사의 뜻에 따라 정읍 내장사에 가서 잠시 머문 것이 본격적인 출가수도가 되었다.
원기 9년 46세에는 이리 송학리 박원석의 집에서 사산 오창건·도산 이동안 등과 더불어 농사를 지었고, 익산총부 건설 당시 엿 장사 등을 하였으며, 원기 10년에는 농업부의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원기 17년에는 마령교당 교무로 부임하여 창설초의 빈한한 교당이라 유지대책이 없었다. 팔산 대봉도는 부임하여 주경야독으로 바로 교리훈련을 시키는 한편 친히 전답개간, 수박재배, 과수원 경영 등에 노력을 기울여 근무 3년 만에 논 4두락을 매입하여 마령교당의 토대를 세우는가 하면 선진농법을 지역사회에 전했다.
팔산 대봉도는 원기 22년 4월, 59세시에 우연히 소화불량증으로 건강이 좋지 못하여 부득이 원평교당 교무를 사임하고 익산총부로 귀관하여 잠시 휴양하며 치료에 전력하였다. 그해 8월 교단 정기간행물인 〈회보(會報)〉에 ‘학이불능(學而不能)’이라는 글을 발표,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를 높이 찬양하였다.

학이불능의 내용은 팔산 대봉도가 옛날 증자의 문하생인 공명선의 배움의 태도에 관한 《소학(小學)》의 일절을 인용한 후 소태산 대종사의 위대한 점을 ① 순일하신 공심 ② 일관하신 성의 ③ 위대하신 포용력 등 3가지로 요약하였다.

원기 23년, 60세시에는 총부 순교무로 임명을 받아 각지를 순회하다 영산교당에 내려갔다. 그러나 7월부터 병이 재발하여 그곳 동지들과 가족들이 온갖 정성을 다 바쳐 노력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원기 24년 2월 21일, 영산교당에서 61세로 열반하였다.
중앙총부에서 팔산 대봉도의 열반 소식을 접한 소태산 대종사는 눈물을 보이며 비통해 하는 가운데 대각전에서 열반식을 거행케 한 후 법상에 올라 팔산 대봉도의 영혼천도를 위하여 ‘생사거래와 업보멸도’란 내용의 법문(〈대종경〉 천도품 28장)을 설했다. <2004,원불교기초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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