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타원 이동진화 (六陀圓 李東震華, 1893~1968)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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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 2026-03-1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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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타원 이동진화 (六陀圓 李東震華, 1893~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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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 x 2361 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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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G
원본코드 : WR000099-006
복원사진 : 111.03.10 육타원 이동진화 젊은 시절 모습 (팔타원 황전신행과 함께 촬영했던 사진)

본명은 경수(慶洙). 법호는 육타원(六陀圓). 법훈은 종사. 1893년 5월에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서 부친 화실(和實)과 모친 김(金)씨의 2남 3녀 중 3녀로 출생했다. 천성이 인자 고결 침착 과묵했고, 일찍 부친을 사별했다. 18세에 이왕가(李王家) 종친 댁으로 출가(出嫁)하여 상당한 부귀를 누렸으나, 세속생활의 재미보다는 종교적 수양생활을 마음 깊이 동경했다. 1924년(원기9) 봄, 서울 당주동 성성원(成聖願)의 집에서 박사시화(朴四時華)의 소개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성불제중이 가장 큰일이라는 말씀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해 여름 침모 김삼매화(金三昧華)를 대동하고 만덕산에서 초선(初禪)을 열고 있던 소태산을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동진화(東震華)란 법명을 받고 초선에 참석했다. 이때부터 출가(出家)를 결심하고, 1925년(원기10) 4월 가산을 정리하고 총부로 와서 전무출신을 시작했다. 이때 교단에 희사한 서울 창신동 가옥은 서울교당의 시초가 되었다. 1931년(원기16) 여자수위단 시보단을 조직할 때 건방(乾方) 단원으로 내정되었고, 뒤에 정식으로 수위단이 발족할 때 이방(零方) 단원이 되어 평생을 수위단원으로 봉직했다.

많은 이들이 관세음보살로 숭배했으며, 여자계의 대표적 수행자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말없는 가운데 교단 구석구석에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베풀었다. 광복이 되자 전재동포구호사업을 후원하면서 서울지방 교세 발전에 전력했다. 춘천에 출장교화를 하는 한편 당시 개성교당의 이경순과 함께 북한교화 개척의 계획도 세웠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는데 다른 동지들을 피난하도록 도와주면서 점령치하의 서울교당을 지켰다. 서울 수복 후에는 금산요양원장의 책임을 맡아 교단 요양사업의 기반수립에 노력했다.

금산요양원은 뒤에 동화병원ㆍ원광한의원 등으로 개편되었고 교단 병원사업의 시초가 되었다. 1955년(원기40)부터는 총부교감ㆍ교령으로 금강원(金剛院)에 주재하면서 인욕수행과 무시선(無時禪)의 실천에 정진했다. 이때부터 자비보살이요, 교단의 어머니로서 교역자들을 두루 보살폈다. 소태산에 대한 신성이 투철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이가 아래인 정산종사에 대해서도 신성을 다해 받들었다. 이동진화는 이완철과 함께 건강이 좋지 못했던 정산을 보필하는 교단 남녀계의 두 기둥이었다.

대산종사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나이였으나 소태산과 정산을 받들 때처럼 신성을 다해 보필하고 받들었다. 1968년(원기53) 1월 어느 날, 좌우동지 후진들에게 “진리는 무상하여 만물은 쉬지 않고 변화한다. 영원무궁한 일원(一圓)의 진리를 잘 배우고 닦아서 고락을 초월하자”는 최후 법문을 남기고, 1월 18일 75세의 세연(世緣)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 1977년(원기62) 출가위의 법위와 종사의 법훈이 추서되었다.<원불교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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