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 송벽조 (久山 宋碧照, 1876~1951)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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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 2026-03-0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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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 송벽조 (久山 宋碧照, 187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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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 송벽조 (宋碧照, 1876~1951)
전무출신, 정산종사 부친, 시창 24년 일본천황에게 가뭄의 책임을 묻는 편지 발송, 시창 25년 일본천황모독사건 구속
사전설명 : 원기38년 선진사진앨범에 있는 원본사진은 시창 23년 경에 촬영된것으로 추정된다.(근거: 소화13년에 박창기와 함께 촬영된 사진과 거의 동일한 시기로 보인다.)

본명은 인기(寅驥). 법호는 구산(久山). 법훈은 대희사. 1876년 9월 11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에서 부친 훈동(薰動)과 모친 이현덕(李顯德)의 독자로 전통 있는 유가(儒家)에서 출생했다.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인 장복추(四未軒張福樞)의 문하생으로서 18세시부터는 매년 유림강습회에 참석하고 경향간(京鄕間) 과장(科場)에도 출입한 유학자였다. 17세시 이운외(李雲外)와 결혼하여 장남 정산종사와 차남 송도성을 낳았다. 장남이 18세시에 “전라도에 가야 만나고자 하는 스승을 만나고 공부를 성취할 수 있겠다”고 함에 아들을 위해 토지를 방매하여 준비를 해준 뒤 김천역까지 전송했다.

이후 1918년(원기3) 4월 정산은 스승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제자가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도 바로 전남 영광을 찾아가 소태산을 만나 보고 15년 연상임에도 스스로 제자가 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1919년(원기4) 9월 70노구의 부친과 전 가족을 거느리고 영광으로 이사를 단행했다. 이후 이재철(一山)의 배려로 영광 군서면 학정리 신촌에서 약 5년간 살다가 다시 백수면 길룡리로 이사해 소태산의 가족과 한 지붕에서 살았다. 1924년(원기9) 8월에는 부친이 열반하자 두 아들의 뒤를 이어 전무출신을 단행했다. 곧이어 영광지부(현 영산교당) 초대교무, 1925년(원기10)부터 3년간 영광 교무부장, 1928년부터 다시 7년간 영광지부 교무, 1935년(원기20)부터 5년간 마령지부 교무, 1944년(원기29) 이후 삼례지부(현 수계교당) 교무, 금산지부(현 원평교당) 교무 등 만 23년간 교무로 봉직했다.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그는 마령 교무로 재직하던 1939년(원기24) 일본이 패도정치로 조선을 유린하는 행패에 분격하여 일왕에게 “지금 조선민중이 도탄에 빠졌으니 정신을 차려 새로운 정책을 세우라”는 진정서를 써 보냈다. 이후 일경이 글쓴이를 찾고자 벌인 진안 경로잔치의 시회(詩會)에서 그 필체가 발각이 되면서 이후 광주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동안 영어(囹圄)의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유학에 능한 그는 소태산과 유가의 경서(經書)에 관해 자주 문답했고, 초기교단의 간행물인 《월말통신》ㆍ《회보》, 그리고 《원광》 등에 각종 글을 발표하고 있으며, 특히 아들의 성장과 구도과정을 소상히 밝힌 ‘정산종사의 구도역정기’(《원광》 49호)를 친히 서술하기도 했다. 또한 남원 광한루 경내에 한시 2편의 현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1951년(원기36) 10월 11일 중앙총부에서, 장남 정산으로부터 “서원성불제중(誓願成佛濟衆) 귀의청정일념(歸依淸淨一念)”의 최후 부탁을 받으며 76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원불교대사전>

원본코드 : WT1020007-000_065 원기 38년 선진사진앨범 속 원본사진
보정복원 : 원기 111년 3월 9년 /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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