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 김대거 종법사 진영(金大擧, 1914~1998) 종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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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 2026-03-0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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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 김대거 종법사 진영(金大擧, 191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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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거 (金大擧, 1914~1998)
주요약력
본명은 영호(榮灝). 법호는 대산(大山). 법훈은 종사. 1914년 음력 3월 16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부친 인오(金仁悟)와 모친 안경신(安敬信)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뒤를 이어 1962년(원기47)부터 1994년(원기79)까지 원불교 종법사를 역임했다.

생애
대산종사는 11세 되던 1924년(원기9) 진안 만덕산에서 개최된 초선(初禪)때 할머니인 노덕송옥(盧德頌玉)의 인도로 소태산에게 귀의했다. 1924년(원기9) 6월 1일 전북 익산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개최한 후 며칠 지나서 소태산이 두 번째로 만덕산에 행가한 바로 그때였다. 대산은 어린나이임에도 정산종사ㆍ오창건ㆍ김광선 등을 비롯한 초창기 쟁쟁한 창립선진 10여 명과 더불어 소태산을 모시고 5월 한 달 동안 선을 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소태산-정산-대산으로 이어진 새 회상 원불교의 3대 주법(三代主法)이 최초로 한자리에 만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1929년(원기14) 16세에 출가한 대산은 3년간 총부에서 학원생활을 하면서 소태산과 은부자(恩父子)의 의를 맺고 서원을 확고히 세웠다. “차신필투공중사 영세진심알역행 인생출세무공적 사아평생하면괴(此身必投公衆事 永世盡心竭力行 人生出世無功績 斯我平生何免愧(이 몸은 반드시 공중사에 던져 영원토록 몸과 마음을 다하리라. 사람으로 태어나 공적이 없다면 이 내 평생 어찌 부끄러움을 면할손가)”(《월말통신》 제35호)라는 입지시가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 후 대산은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서무ㆍ상조ㆍ공익ㆍ육영ㆍ교무 각 부서의 서기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소태산의 시봉도 겸했다.

20세가 되던 1935년(원기20)에 한살 위인 이영훈(李永勳)과 결혼한 대산은 가사를 일체 불고하며, 봉직하다가 1936년(원기21)경에 사가를 정리하여 총부 부근으로 이사했다. 이어 1937년(원기22)부터 서무부장ㆍ교무부장ㆍ감사부장ㆍ총부 교감 겸 예감 등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아울러 속 깊은 수도적공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하는 멋과 여유도 즐겼다. “조그마한 우주선에 이 한 몸 태우고서 다북 찬 호연대기 노삼아 저어가니 아마도 방외유객은 나뿐인가 하노라”(사공(沙工), 《회보》 제47호)을 비롯하여 ‘피안의 님’(《회보》 제56호), ‘일여선가(一如船歌)’(《회보》 제58호) 등 낙도의 심경을 시로 표현하면서 공사에 전념한 것이다.

대산은 의문점이 생기면 소태산에게 여쭙고 감정을 받으면서 법도 있는 공부에 정성을 쏟았다. 대산이 어느 날 소태산에게 법강항마위의 취사공부에 대해서 질문했다. “김대거 여쭙기를 ‘법강항마위부터는 계문이 없사오니 취사 공부는 다된 것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법강항마위부터는 첫 성위(聖位)에 오르는지라, 법에 얽매이고 계문에 붙잡히는 공부는 아니하나, 안으로는 또한 심계(心戒)가 있나니, 그 하나는 자신의 수도와 안일만 취하여 소승에 흐를까 조심함이요, 둘은 부귀향락에 빠져서 본원이 매각될까 조심함이요, 셋은 혹 신통이 나타나 함부로 중생의 눈에 띄어 정법에 방해될까 조심함이라, 이밖에도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학을 공부하여, 위로 불지를 더 갖추고 아래로 자비를 더 길러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공을 쌓아야 하나니라’”(《대종경》 수행품63).

생사거래의 원리와 열반 후 영혼 천도의 의의와 방법에 관한 법문들을 모아 수록한 《대종경》 ‘천도품’의 내용 가운데 32장부터 38장까지 총7장의 법문이 대산과 소태산의 문답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소태산은 일찍이 대산이 속 깊은 적공을 통해 일원의 진리를 요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엄격히 지도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대산종법사법문집3》 제5편에 이렇게 수록되어 있다.

“대종사님께서는 중근에 걸려있는 제자들을 대중 앞에서 지적하시며 중근의 말로가 위태하다는 법문을 직접 내려주셨다. 그 후 삼산종사를 보고 ‘삼산도 3년 정도 그 고비에 머물렀으나 이제 넘어섰다’고 출가위 인증을 해주신 일이 있으셨고, 주산종사에게도 ‘그 고비를 넘겼노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대종사님께서 ‘너도 조심하라’하시어 나는 그때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반성하다가 한마음 얻음에 대종사님께서 크게 인증하여 주시었다. 그때가 나로서는 마음이 새로 난 날이며 대종사께서 열반하시던 해의 정월 초나흘이었다.”

이를 통하여 소태산이 여러 제자들로 하여금 대산이 큰 법기임을 암암리에 깨달을 수 있도록 배려했음은 물론이요, 대산이 소태산의 지도에 절대 복종하는 투철한 신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대산은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이 열반할 때까지 줄곧 교단 간부로서 총부를 떠나지 않고 측근에 머물면서 법설을 받들고 수필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는데,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회보》 제46호)를 비롯한 수편의 소태산 수필 법설을 남겼다. 소태산이 열반한 후 정산이 종법사의 대임을 계승하자 정산을 보필하며 교단발전에 헌신하던 대산은 1946년(원기31) 총부 서울출장 소장에 피임, 광복 직후 3년간 다단한 원불교 역사에 큰 역할을 했다. 백범 김구 등 정계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한국사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그 후로 원평ㆍ총부ㆍ진영ㆍ다대 등지에서 《대종경》 자료를 정리했으며, 한국전쟁 와중이던 1952년(원기37)에는 수위단 중앙에 피선되고 교정원장에 선임되어 교정 실무를 담당하며 교단의 든든한 대들보로 자리매김하면서 정산의 경륜과 포부를 받들어 실현하는데 힘을 다했다. 1959년(원기44)에는 중앙선원장에 피임되었으나 영산에서 요양하면서 정관평 재방언공사와 성지사업의 기초를 세웠고, 1961년(원기46)부터는 하섬, 신도안 등지에서 교재를 연마 중 정산의 특별유시로 정화사(正化社) 감수위원에 위촉되었다.

정산이 1962년(원기47)에 열반하자 법통을 계승하여 2월 23일, 49세에 종법사 위에 오르고 1994년(원기79) 11월 대사식을 통해 좌산 이광정 종사에게 법좌를 양위하기까지 6차에 걸쳐 종법사를 연임, 33년간 교단의 주법으로서 교화를 주재하고 교단발전에 헌신했다.<고원국,원불교대사전>

대산 김대거 종법사 진영 AI 복원 > 대산종사탄백100주년기념사업 때 배너 전시를 목적으로 수집된 원본파일(WR000123-001)을 사용하여 인공지능 보정한 사진 파일로 교화 활용 목적.
2차생산날짜 : 원기 111년 3월 9일 / 2차생산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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