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 1909~1960)-대종사 모신 시절의 모습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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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 2026-02-1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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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 1909~1960)-대종사 모신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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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1909~1960)
사진설명 : 소태산 대종사, 박허주와 함께 촬영했던 기록 사진을 독사진으로 추출하여 복원한 것으로 남아 있는 사진 중에서 당시 대종사와 함께 있을 시기의 젊은 전음광의 모습이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당시 장례 과정을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원본코드 : WT1030254-000_7
복원기관 : 원불교 기록관리소
복원날짜 : 원기 111년 2월 10일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불교대사전>
주요약력
본명은 세권(世權). 법호는 혜산(惠山). 법훈은 대봉도. 불법연구회 연구부장, 교무부장, 서무부장, 서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전음광은 1909년 6월 17일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부친 영규(永奎)와 모친 전삼삼(田參參)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평지리에서 쌀 5백석을 추수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전음광은 성격이 활달했으며 두뇌가 치밀하고 명석하여 매사에 준비함이 철저했다. 일찍이 한문공부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1세 되던 해 16세인 권동화(東陀圓權動華)와 결혼했다. 전음광이 소태산대종사를 처음 뵌 것은 1923년(원기8) 1월 모친을 따라 진안 만덕산에 갔을 때였다. 그 후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두 번째로 소태산을 뵙게 되었으며, 마음에 느낀 바 있어 학교를 중퇴하고 전무출신이 되어 소태산을 모시고 다니기로 했다.

모친의 연원으로 입교한 전음광은 소태산을 시봉하며 익산총부 건설에 정성을 다해 조력했다. 모친의 소태산에 대한 신심은 마령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다시 익산총부로 이사하기에 이르렀다. 모친은 소태산의 식사를 전담했고 전음광은 회화ㆍ강연ㆍ상시일기ㆍ감각감상ㆍ심신작용처리건을 소태산에게서 직접 지도받았다. 1926년(원기11) 서무부서기로 임명되어 교무사무를 아울러 5년간 근무했다. 그리고 ‘청년단’을 만들어 일반 청년들의 체육ㆍ음악 등 연예지도를 담당했다.

1932년(원기17)부터 3년간은 연구부장과 교무부장을 지냈고 다시 2년간 교무부장을 맡으면서 총부구내에 야학원을 만들어 100여 명의 아동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지금 우리 교세는 미약하다. 그러나 원대한 계획과 이상과 포부는 어디에도 지지 않는다”는 긍지와 신념으로 신성을 키웠다. 소금에 절인 아카시아 밥도 달게 먹었고, 소태산의 교법이 전 세계 인류의 무상묘법임을 확신하며 미래 세상의 정신적 주인이 될 뜻을 확고히 했다. 전음광은 또한 명쾌한 웅변가였다. 엄격한 형식에 매인 종교인이기보다는 활달하며 정이 있고 멋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소태산과 최초로 은부자(恩父子)의 결의를 맺고 가까이서 시봉을 하며 지도를 받았으며, 소태산의 꾸중과 칭찬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으며 인격을 도야했다. 어느 날 회화에서 공부인과 비공부인의 차이점을 감상 발표하여 대중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대종경》 수행품11). 전음광은 교단의 많은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이기도 했다. 사진사를 직접 집으로 초청하여 1개월간 실지 실습하며, 벽장을 암실로 만들어 필름현상을 할 만큼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교단기관지 발행을 외친 시대감각과 비전을 가진 선각자였다.

1929년(원기14) 7월 《월말통신》 제17호에 기고한 ‘회설’에서 “기관지는 그 사회나 단체의 호흡이다. 시대에 적응한 문물과 사조를 때때로 주입하여 잠자는 자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게으른 자로 하여금 근면하게 하여 그 사회 그 단체의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관지는 난산한 시대사조를 레일 위로 이끌어 가는 기관차’라고 했다. 《회보》 발행의 필요에 대하여는 본교의 힘줄과 피를 잘 활동하게 하는 촉매체로 보고 있다.

전음광의 열정적인 외침으로 1928년(원기13) 5월에 《월말통신》 창간호가 복사판으로 나왔고, 다시 《월보》, 《회보》로 이름을 달리하여 마침내 《원광》으로 되기까지 전음광의 열과 성이 밑받침이 된 것이다. 전음광은 공익사업에도 눈을 돌렸다. 현대는 공익사업을 전개하는 종교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아 《월말통신》 회설을 통해 주장하는 등 교단의 제반문제를 드러내 논리 정연한 문장으로 소태산의 높은 이상과 포부를 대변했다. 어린이 교육을 위한 유아양성소 설치며 유치원 설립, 우리 교법으로 지도할 수 있는 학교 설립, 양로원 개설, 병원 설립, 남자 교역자생활까지 여러 문제와 그 해결방책을 제시했다.

일정(日政)말기 교단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전음광은 일본 경찰과 접촉하여 침착하고도 능란한 말과 글로 그들을 감화시켰다. 이렇게 전음광은 소태산과 교단을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온 공심가였다. 전음광은 광복 이후 교직을 놓고 휴양하다가 1960년(원기45) 7월 21일 52세를 일기로 열반했으며, 장녀 팔근이 전무출신했다. 1985년(원기70) 3월 제103회 수위단회에서는 전음광의 공적을 기려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사상
전음광은 활발한 집필활동을 통해 1928년(원기13)부터 1940년(원기25)까지 12년 동안 《월말통신》, 《월보》, 《회보》의 권두 ‘회설’ 총 95편중 83편을 집필했다. 그중에 몇 편의 회설을 통해 전음광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① 대업을 완성토록 용맹 매진하라:“본회(불법연구회)는 14년의 역사를 가지고 경성, 부안, 영광(영산) 등지에 몇 개의 기초를 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들은 이때에 있어 환희만 할 것도 아니요, 자만할 것도 아니요, 더 한층 용맹매진의 분투력을 발하여야만 창립자인 우리의 떳떳한 의무라 할 것이다.…모든 동지여 서양의 예수는 3년의 전도(傳道)로 동서의 종교계에 패권을 장악했나니 이는 예수의 법을 믿고 활동한 신도들의 악전고투한 결과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종사주(대종사)의 다년간 설법이 계셨고 그 법을 운용할 기관이 대체로 구성이 되었으니 우리의 결심이 굳고 능력이 있다면 우리의 교리와 우리의 사업이 서양인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법을 내심은 종사주(대종사)에게 있고 그 법을 널리 확장할 의무는 우리에게 있나니 우리는 이 의무를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이다”(《월말통신》 제12호).

②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사람의 정신은 하나라 하겠지만 그 정신을 운용하는 방면에 따라서 기술적 정신과 도덕적 정신의 양 방면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현대 사람들은 모든 물질을 발명하고 제도하는 기술적 정신은 한량없이 개벽되어가고 있으나 그 물질을 구하고 사용하는 도덕적 정신은 아직도 개벽되지 못했으므로 이 구하는 정신과 사용하는 정신을 개벽시키자는 것이다.…현대는 진기한 물질이 발명될수록 그 발달된 기술과 무기를 이용하여 범죄자는 나날이 증가하며 인류생활은 잔혹한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그 발명된 물질을 자기의 이욕을 얻고자 하는데 사용하는 까닭으로 그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이 개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용하는 정신을 개벽시키자는 것은 정당한 교법으로 사람을 교화하여 불의는 죽어도 행치 아니하고 정의는 죽어도 행하는 실행공부를 시켜서 불의한 곳에는 그 물질을 사용치 않게 하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저 사람도 이롭고 나도 이로운 자리이타의 곳에만 그 물질을 사용하도록 정신을 개벽하자는 것이다. 그리한다면 물질문명이 인류생활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韓正釋〉

교단연혁 : https://wonds.kr/chronology/view.php?id=8&page=1&search=&limit=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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