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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타원 이동진화 (六陀圓 李東震華, 1893~1968)
육타원 이동진화 (六陀圓 李東震華, 1893~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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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코드 : WR000099-006 복원사진 : 111.03.10 육타원 이동진화 젊은 시절 모습 (팔타원 황전신행과 함께 촬영했던 사진) 본명은 경수(慶洙). 법호는 육타원(六陀圓). 법훈은 종사. 1893년 5월에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서 부친 화실(和實)과 모친 김(金)씨의 2남 3녀 중 3녀로 출생했다. 천성이 인자 고결 침착 과묵했고, 일찍 부친을 사별했다. 18세에 이왕가(李王家) 종친 댁으로 출가(出嫁)하여 상당한 부귀를 누렸으나, 세속생활의 재미보다는 종교적 수양생활을 마음 깊이 동경했다. 1924년(원기9) 봄, 서울 당주동 성성원(成聖願)의 집에서 박사시화(朴四時華)의 소개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성불제중이 가장 큰일이라는 말씀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해 여름 침모 김삼매화(金三昧華)를 대동하고 만덕산에서 초선(初禪)을 열고 있던 소태산을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동진화(東震華)란 법명을 받고 초선에 참석했다. 이때부터 출가(出家)를 결심하고, 1925년(원기10) 4월 가산을 정리하고 총부로 와서 전무출신을 시작했다. 이때 교단에 희사한 서울 창신동 가옥은 서울교당의 시초가 되었다. 1931년(원기16) 여자수위단 시보단을 조직할 때 건방(乾方) 단원으로 내정되었고, 뒤에 정식으로 수위단이 발족할 때 이방(零方) 단원이 되어 평생을 수위단원으로 봉직했다. 많은 이들이 관세음보살로 숭배했으며, 여자계의 대표적 수행자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말없는 가운데 교단 구석구석에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베풀었다. 광복이 되자 전재동포구호사업을 후원하면서 서울지방 교세 발전에 전력했다. 춘천에 출장교화를 하는 한편 당시 개성교당의 이경순과 함께 북한교화 개척의 계획도 세웠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는데 다른 동지들을 피난하도록 도와주면서 점령치하의 서울교당을 지켰다. 서울 수복 후에는 금산요양원장의 책임을 맡아 교단 요양사업의 기반수립에 노력했다. 금산요양원은 뒤에 동화병원ㆍ원광한의원 등으로 개편되었고 교단 병원사업의 시초가 되었다. 1955년(원기40)부터는 총부교감ㆍ교령으로 금강원(金剛院)에 주재하면서 인욕수행과 무시선(無時禪)의 실천에 정진했다. 이때부터 자비보살이요, 교단의 어머니로서 교역자들을 두루 보살폈다. 소태산에 대한 신성이 투철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이가 아래인 정산종사에 대해서도 신성을 다해 받들었다. 이동진화는 이완철과 함께 건강이 좋지 못했던 정산을 보필하는 교단 남녀계의 두 기둥이었다. 대산종사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나이였으나 소태산과 정산을 받들 때처럼 신성을 다해 보필하고 받들었다. 1968년(원기53) 1월 어느 날, 좌우동지 후진들에게 “진리는 무상하여 만물은 쉬지 않고 변화한다. 영원무궁한 일원(一圓)의 진리를 잘 배우고 닦아서 고락을 초월하자”는 최후 법문을 남기고, 1월 18일 75세의 세연(世緣)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 1977년(원기62) 출가위의 법위와 종사의 법훈이 추서되었다.<원불교대사전>

팔타원 황정신행 (八陀圓 黃淨信行,1903~2004)
팔타원 황정신행 (八陀圓 黃淨信行,1903~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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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타원 황정신행 (八陀圓 黃淨信行) 젊은 시절 사진 원본코드 : WR000099-006 복원사진 : 111.03.09 원불교기록관리소 (육타원 이동진화와 함께 촬영했던 사진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어 옛 영산회상의 수달장자와 같이 회상 창립에 막대한 정재(淨財)를 희사, 원불교 대호법(大護法)의 문열이가 되고, 수많은 한국 고아들의 큰 어머니가 된 팔타원 황정신행(八陀圓 黃淨信行, 본명: 황온순) 종사 [사진촬영시기 추정] 시창 26년(1941) 정신원 신축할 때 시기로 추정 / 사진 연도 기록은 없음 * 시창 20년 개성교당 이천륜 만나 불법연구회 소개 받음 * 서울교당(당시 돈암동 소재)에 나가 이완철과 이동진화를 만남 사진 * 시창 22년에 소태산 대종사 털 외투 올림 * 시창 23년에 서울지부에서 소태산 대종사 만남. * 시창 26년에 총부 구내 사가 건물 정신원 신축 후에 희사. 익산지부 임시사용, 정화사 사무실 개요 본명은 온순(溫順). 법호는 팔타원(八陀圓). 법훈은 종사. 재가교도로 여성 최초의 구인제자인 수위단원 역임. 휘경학원과 사회복지법인 창필재단을 설립했다. 대한민국 사회사업의 대모, 한국 고아의 어머니로 불렸다. 생애와 활동 황정신행은 1903년 7월 10일 황해도 연안에서 부친 원준(元俊)과 모친 송귀중화(宋貴重華)의 장녀로 출생하여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유복하게 성장했다. 13세에 서울로 유학, 이화학당 중등부를 졸업하고, 이어 경성여자보통학교에서 1년간 일본어를 배우던 중 부친의 열반으로 귀향, 3ㆍ1운동을 맞았다. 1921년 중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여자사범학교에 들어가 3년 동안 중국어를 공부했고 이어 유치원 교사를 하다가 귀국, 이화여전 보육과를 1927년에 제2회로 졸업했다. 개화기의 신여성인 황정신행은 일본계 정토종 불교재단에서 경영하는 화광교원(和光敎院)에 들어가 관수동에서 화광유치원을 신설하고 교사 일을 맡아 보았다. 27세에 황해도 재령 사람으로 당시 서울 장안의 부호인 강익하(康益夏)와 결혼, 1남 2녀를 두었다. 서울 종각 부근에 순천상회(포목점)를 차리고 동대문 부인병원(현 이화여대 부속병원)을 인수하는 등 부(富)를 축적했다. 황정신행과 원불교의 인연은 불연지인 금강산에서 비롯되었다. 원만하지 못한 가정 문제와 세속생활의 번뇌를 떨치고자 1935년(원기20) 여름 아들 필국(弼國)을 데리고 금강산을 찾아 여행하던 중에 개성교당 교도 이천륜(李天倫)을 만나 불법연구회를 소개받았다. 이어 그의 연원으로 서울교당(당시 돈암동 소재)에 나가 이완철과 이동진화를 만나고 이완철로부터 《금강경》을 배웠다. 이어 1938년(원기23) 35세 되던 해에 서울교당에서 소태산대종사와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소태산과의 문답을 통해 30년 동안 들어온 기독교 목사의 말과는 달리 현세에서 무슨 희망이 있는 것 같았고, 부처되는 법까지 가르쳐준다는 말씀이 마음 가운데 크게 부딪혀 옴에 황정신행은 신심을 크게 발하여 제자가 되었다. 영생과 인과의 진리에 대한 믿음과 소태산이 새 부처님이라는 확신을 가진 황정신행은 중앙총부와 서울교당의 유지 발전은 물론 창업기 갖가지 교단 경제난을 극복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소태산은 황정신행이 서울에서 한번씩 익산총부에 오면 특별히 대중을 모아 성리 법문을 설하여 그로 하여금 큰 사업과 아울러 속 깊은 공부를 겸하도록 배려했다. 1939년(원기24) 기묘동선(己卯冬禪) 때였다. 선원대중이 총부 공회당에 모여 소태산의 법설을 받든 후 송도성의 지도로 일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혜수와 혜시 등 사업성적 관련사항을 세세히 기록하게 함을 보고 황정신행이 심도 있는 질의를 소태산에게 했고 그에 대한 답을 정리한 것이 다음 《대종경》 교단품35장 내용이다. 황정신행이 “과거 부처님께서는 무념보시를 하라 하시고 예수께서는 오른 손으로 주는 것을 왼 손도 모르게 하라 했사온데, 대종사께서는 사업등급을 두시어 모든 교도의 성적을 다 기록하게 하시니, 혹 사업하는 사람들의 계교심을 일으키는 원인도 되지 아니하오리까”하고 묻자, 소태산은 “사업을 하는 당인들에 있어서는 마땅히 무념으로 하여야만 무루의 복이 쌓이려니와 공덕을 존숭하고 표창할 처지에서는 또한 분명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 심히 간고했던 당시 총부 살림에 서울에서 총부로 내려올 적마다 상당한 정재를 가져왔던 황정신행의 입장에서 무념보시의 정신을 대중에게 일깨웠던 점은 교단 만대를 통해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정산종사는 이러한 황정신행에게 1957년(원기42) 4월 제1차 법훈증여식전에서 대호법의 원훈(元勳)을 주어 그 빛나는 공덕을 기렸다. 성장하면서 부친이 약자들을 돕는 모습에 영향을 받은 데다 이어 원불교의 타자녀교육의 교리정신에 바탕하여 황정신행은 한국고아들의 대모가 된다. 총부 안에 탁아소를 하게 되자, 소태산의 명을 받아 탁아소장이 되었고, 8ㆍ15광복이 되자, 송도성과 더불어 서울 남대문에서 ‘전재동포구제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서울 한남동의 일본인 사찰인 약초관음사(若草觀音寺)를 인수해 ‘보화원(普和園)’을 설립, 초대 원장이 되었다. 60여 명의 고아들을 수용해 설립한 보화원은 원불교 고아원의 효시가 되었다. 1950년 4월 UN의 사업 분야 지도자 양성을 위한 요원으로 선발되어 사회사업 훈련 및 시찰을 위해 영국을 순방하던 중 한국전쟁을 만난 황정신행은 9ㆍ28수복 이후 귀국, 전쟁 중에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딛고서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을 받아 9백여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제주도로 향한다. 한국보육원 원장직을 맡아 혼돈과 무질서, 겹치는 흉년으로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어려운 고아원을 꾸려가면서도 원불교의 정신을 원아들에게 심어주어 용기를 잃지 않게 했다. 1956년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전송가(戰頌歌)〉란 영화를 제작하면서 황정신행 원장과 한국보육원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어린이는 가정이나 국가라는 지역적인 한계를 초월한 우주적인 존재이다. 국가나 지역을 떠난 우주적인 안목으로 한 생명을 바라보고 인류애를 발휘해야 한다”고 호소, 외국인들로부터 많은 협조를 받았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서 황정신행은 동원도리ㆍ동기연계ㆍ동척사업의 삼동윤리(三同倫理)를 더욱 새롭게 체험했다. 제주도에서 7년여를 지낸 한국보육원은 그 후 서울 이문동 천막촌과 휘경학원 자리를 거쳐 현재 양주 진달래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황정신행은 1982년(원기67)에 사회복지법인 ‘창필재단(昌弼財團)’을 설립, 한국보육원을 이에 귀속시켜 원불교 교단에 희사했다. 새싹회에서 1984년 그에게 수여한 제28회 소파상은 한국고아의 어머니로서 일생을 오롯이 헌신해온 거룩한 삶에 한 증표가 되었다. 또한 황정신행은 1970년에 학교법인 ‘휘경학원(徽慶學園)’을 설립, 산하에 휘경여중ㆍ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건학이념에 원불교 정신을 담아 여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92년에 《황온순, 천성(天聲)을 받들어 구십 년》이라는 문집이 발행되었다. 원불교 교단사업에 많은 정재를 희사하여 원불교의 수달장자라는 별호를 얻었다. 2004년 6월 29일 열반했다. 〈宋仁傑,원불교대사전〉 복원사진 : 111.03.09 원불교기록관리소

구산 송벽조 (久山 宋碧照, 1876~1951)
구산 송벽조 (久山 宋碧照, 187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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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산 송벽조 (宋碧照, 1876~1951) 전무출신, 정산종사 부친, 시창 24년 일본천황에게 가뭄의 책임을 묻는 편지 발송, 시창 25년 일본천황모독사건 구속 사전설명 : 원기38년 선진사진앨범에 있는 원본사진은 시창 23년 경에 촬영된것으로 추정된다.(근거: 소화13년에 박창기와 함께 촬영된 사진과 거의 동일한 시기로 보인다.) 본명은 인기(寅驥). 법호는 구산(久山). 법훈은 대희사. 1876년 9월 11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에서 부친 훈동(薰動)과 모친 이현덕(李顯德)의 독자로 전통 있는 유가(儒家)에서 출생했다.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인 장복추(四未軒張福樞)의 문하생으로서 18세시부터는 매년 유림강습회에 참석하고 경향간(京鄕間) 과장(科場)에도 출입한 유학자였다. 17세시 이운외(李雲外)와 결혼하여 장남 정산종사와 차남 송도성을 낳았다. 장남이 18세시에 “전라도에 가야 만나고자 하는 스승을 만나고 공부를 성취할 수 있겠다”고 함에 아들을 위해 토지를 방매하여 준비를 해준 뒤 김천역까지 전송했다. 이후 1918년(원기3) 4월 정산은 스승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제자가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도 바로 전남 영광을 찾아가 소태산을 만나 보고 15년 연상임에도 스스로 제자가 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1919년(원기4) 9월 70노구의 부친과 전 가족을 거느리고 영광으로 이사를 단행했다. 이후 이재철(一山)의 배려로 영광 군서면 학정리 신촌에서 약 5년간 살다가 다시 백수면 길룡리로 이사해 소태산의 가족과 한 지붕에서 살았다. 1924년(원기9) 8월에는 부친이 열반하자 두 아들의 뒤를 이어 전무출신을 단행했다. 곧이어 영광지부(현 영산교당) 초대교무, 1925년(원기10)부터 3년간 영광 교무부장, 1928년부터 다시 7년간 영광지부 교무, 1935년(원기20)부터 5년간 마령지부 교무, 1944년(원기29) 이후 삼례지부(현 수계교당) 교무, 금산지부(현 원평교당) 교무 등 만 23년간 교무로 봉직했다.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을 가진 그는 마령 교무로 재직하던 1939년(원기24) 일본이 패도정치로 조선을 유린하는 행패에 분격하여 일왕에게 “지금 조선민중이 도탄에 빠졌으니 정신을 차려 새로운 정책을 세우라”는 진정서를 써 보냈다. 이후 일경이 글쓴이를 찾고자 벌인 진안 경로잔치의 시회(詩會)에서 그 필체가 발각이 되면서 이후 광주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동안 영어(囹圄)의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유학에 능한 그는 소태산과 유가의 경서(經書)에 관해 자주 문답했고, 초기교단의 간행물인 《월말통신》ㆍ《회보》, 그리고 《원광》 등에 각종 글을 발표하고 있으며, 특히 아들의 성장과 구도과정을 소상히 밝힌 ‘정산종사의 구도역정기’(《원광》 49호)를 친히 서술하기도 했다. 또한 남원 광한루 경내에 한시 2편의 현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1951년(원기36) 10월 11일 중앙총부에서, 장남 정산으로부터 “서원성불제중(誓願成佛濟衆) 귀의청정일념(歸依淸淨一念)”의 최후 부탁을 받으며 76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원불교대사전> 원본코드 : WT1020007-000_065 원기 38년 선진사진앨범 속 원본사진 보정복원 : 원기 111년 3월 9년 /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대산 김대거 종법사 진영(金大擧, 1914~1998)
대산 김대거 종법사 진영(金大擧, 191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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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거 (金大擧, 1914~1998) 주요약력 본명은 영호(榮灝). 법호는 대산(大山). 법훈은 종사. 1914년 음력 3월 16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부친 인오(金仁悟)와 모친 안경신(安敬信)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뒤를 이어 1962년(원기47)부터 1994년(원기79)까지 원불교 종법사를 역임했다. 생애 대산종사는 11세 되던 1924년(원기9) 진안 만덕산에서 개최된 초선(初禪)때 할머니인 노덕송옥(盧德頌玉)의 인도로 소태산에게 귀의했다. 1924년(원기9) 6월 1일 전북 익산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개최한 후 며칠 지나서 소태산이 두 번째로 만덕산에 행가한 바로 그때였다. 대산은 어린나이임에도 정산종사ㆍ오창건ㆍ김광선 등을 비롯한 초창기 쟁쟁한 창립선진 10여 명과 더불어 소태산을 모시고 5월 한 달 동안 선을 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소태산-정산-대산으로 이어진 새 회상 원불교의 3대 주법(三代主法)이 최초로 한자리에 만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1929년(원기14) 16세에 출가한 대산은 3년간 총부에서 학원생활을 하면서 소태산과 은부자(恩父子)의 의를 맺고 서원을 확고히 세웠다. “차신필투공중사 영세진심알역행 인생출세무공적 사아평생하면괴(此身必投公衆事 永世盡心竭力行 人生出世無功績 斯我平生何免愧(이 몸은 반드시 공중사에 던져 영원토록 몸과 마음을 다하리라. 사람으로 태어나 공적이 없다면 이 내 평생 어찌 부끄러움을 면할손가)”(《월말통신》 제35호)라는 입지시가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 후 대산은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서무ㆍ상조ㆍ공익ㆍ육영ㆍ교무 각 부서의 서기를 차례로 역임하면서 소태산의 시봉도 겸했다. 20세가 되던 1935년(원기20)에 한살 위인 이영훈(李永勳)과 결혼한 대산은 가사를 일체 불고하며, 봉직하다가 1936년(원기21)경에 사가를 정리하여 총부 부근으로 이사했다. 이어 1937년(원기22)부터 서무부장ㆍ교무부장ㆍ감사부장ㆍ총부 교감 겸 예감 등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아울러 속 깊은 수도적공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하는 멋과 여유도 즐겼다. “조그마한 우주선에 이 한 몸 태우고서 다북 찬 호연대기 노삼아 저어가니 아마도 방외유객은 나뿐인가 하노라”(사공(沙工), 《회보》 제47호)을 비롯하여 ‘피안의 님’(《회보》 제56호), ‘일여선가(一如船歌)’(《회보》 제58호) 등 낙도의 심경을 시로 표현하면서 공사에 전념한 것이다. 대산은 의문점이 생기면 소태산에게 여쭙고 감정을 받으면서 법도 있는 공부에 정성을 쏟았다. 대산이 어느 날 소태산에게 법강항마위의 취사공부에 대해서 질문했다. “김대거 여쭙기를 ‘법강항마위부터는 계문이 없사오니 취사 공부는 다된 것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법강항마위부터는 첫 성위(聖位)에 오르는지라, 법에 얽매이고 계문에 붙잡히는 공부는 아니하나, 안으로는 또한 심계(心戒)가 있나니, 그 하나는 자신의 수도와 안일만 취하여 소승에 흐를까 조심함이요, 둘은 부귀향락에 빠져서 본원이 매각될까 조심함이요, 셋은 혹 신통이 나타나 함부로 중생의 눈에 띄어 정법에 방해될까 조심함이라, 이밖에도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학을 공부하여, 위로 불지를 더 갖추고 아래로 자비를 더 길러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공을 쌓아야 하나니라’”(《대종경》 수행품63). 생사거래의 원리와 열반 후 영혼 천도의 의의와 방법에 관한 법문들을 모아 수록한 《대종경》 ‘천도품’의 내용 가운데 32장부터 38장까지 총7장의 법문이 대산과 소태산의 문답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소태산은 일찍이 대산이 속 깊은 적공을 통해 일원의 진리를 요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엄격히 지도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대산종법사법문집3》 제5편에 이렇게 수록되어 있다. “대종사님께서는 중근에 걸려있는 제자들을 대중 앞에서 지적하시며 중근의 말로가 위태하다는 법문을 직접 내려주셨다. 그 후 삼산종사를 보고 ‘삼산도 3년 정도 그 고비에 머물렀으나 이제 넘어섰다’고 출가위 인증을 해주신 일이 있으셨고, 주산종사에게도 ‘그 고비를 넘겼노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대종사님께서 ‘너도 조심하라’하시어 나는 그때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반성하다가 한마음 얻음에 대종사님께서 크게 인증하여 주시었다. 그때가 나로서는 마음이 새로 난 날이며 대종사께서 열반하시던 해의 정월 초나흘이었다.” 이를 통하여 소태산이 여러 제자들로 하여금 대산이 큰 법기임을 암암리에 깨달을 수 있도록 배려했음은 물론이요, 대산이 소태산의 지도에 절대 복종하는 투철한 신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대산은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이 열반할 때까지 줄곧 교단 간부로서 총부를 떠나지 않고 측근에 머물면서 법설을 받들고 수필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는데, ‘일원상과 인간과의 관계’(《회보》 제46호)를 비롯한 수편의 소태산 수필 법설을 남겼다. 소태산이 열반한 후 정산이 종법사의 대임을 계승하자 정산을 보필하며 교단발전에 헌신하던 대산은 1946년(원기31) 총부 서울출장 소장에 피임, 광복 직후 3년간 다단한 원불교 역사에 큰 역할을 했다. 백범 김구 등 정계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한국사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그 후로 원평ㆍ총부ㆍ진영ㆍ다대 등지에서 《대종경》 자료를 정리했으며, 한국전쟁 와중이던 1952년(원기37)에는 수위단 중앙에 피선되고 교정원장에 선임되어 교정 실무를 담당하며 교단의 든든한 대들보로 자리매김하면서 정산의 경륜과 포부를 받들어 실현하는데 힘을 다했다. 1959년(원기44)에는 중앙선원장에 피임되었으나 영산에서 요양하면서 정관평 재방언공사와 성지사업의 기초를 세웠고, 1961년(원기46)부터는 하섬, 신도안 등지에서 교재를 연마 중 정산의 특별유시로 정화사(正化社) 감수위원에 위촉되었다. 정산이 1962년(원기47)에 열반하자 법통을 계승하여 2월 23일, 49세에 종법사 위에 오르고 1994년(원기79) 11월 대사식을 통해 좌산 이광정 종사에게 법좌를 양위하기까지 6차에 걸쳐 종법사를 연임, 33년간 교단의 주법으로서 교화를 주재하고 교단발전에 헌신했다.<고원국,원불교대사전> 대산 김대거 종법사 진영 AI 복원 > 대산종사탄백100주년기념사업 때 배너 전시를 목적으로 수집된 원본파일(WR000123-001)을 사용하여 인공지능 보정한 사진 파일로 교화 활용 목적. 2차생산날짜 : 원기 111년 3월 9일 / 2차생산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훈산 이춘풍(薰山 李春風,1876~1930)
훈산 이춘풍(薰山 李春風,1876~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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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산 이춘풍(薰山 李春風,1876~1930) 소태산 대종사 영산과 변산을 내왕하는 소태산과 그 제자들의 시봉을 맡는 한편, 종곡 사가와 실상초당을 왕래하며 소태산의 가르침을 받는 동시에 47세시에는 초기 경전 편찬에 조력했다. 시창 12년 산중풍경 저술 / 소태산대종사 종곡유숙터(이춘풍선진 집터)' 교적 제12호 지정 교단연표 : https://wonds.kr/chronology/?limit=10&search=%EC%9D%B4%EC%B6%98%ED%92%8D 본명은 지영(之永). 법호는 훈산(薰山). 정산종사의 외사촌 형. 1876년 2월 6일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구성면 하원리에서 부친 현옥(鉉沃)과 모친 김씨의 1남 2녀 중 독자로 출생했다. 12세에 백부 현각(鉉珏)에게 출계(出系)했고, 16세에 경타원 정삼리화(敬陀圓鄭三零火)와 결혼하여 딸 여덟을 두었다. 그중 두 딸이 전무출신으로 항타원 이경순과 달타원 이정화이다. 1921년(원기6) 고모부 되는 구산 송벽조의 인도로 변산 봉래정사를 찾아 소태산대종사의 제자가 되고, 그해 겨울 부인(정삼리화)과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도로 이사, 부안군 보안면 신복리 종곡으로 이사해 왔다. 종곡은 변산으로 드는 초입에 있는 마을로 영광과 변산간 노정의 유숙처로 알맞은 위치에 있었다. 이춘풍은 영산과 변산을 내왕하는 소태산과 그 제자들의 시봉을 맡는 한편, 종곡 사가와 실상초당을 왕래하며 소태산의 가르침을 받는 동시에 47세시에는 초기 경전 편찬에 조력했다. 어느 날 변산 내소사에 딸린 암자인 청련암 뒷산을 넘으며 소태산으로부터 다음의 법문을 듣는다. ‘험한 길을 당하니 일심공부가 저절로 되는도다. 그러므로 길을 가되 험한 곳에서는 오히려 실수가 적고 평탄한 곳에서 실수가 있기 쉬우며, 일을 하되 어려운 일에는 오히려 실수가 적고 쉬운 일에 도리어 실수가 있기 쉽나니, 공부하는 사람이 험하고 평탄한 곳이나 어렵고 쉬운 일에 대중이 한결같아야 일행삼매(一行三昧)의 공부를 성취하리라’(《대종경》 수행품34). 이춘풍은 1923년(원기8) 여름 소태산 모친의 열반으로 영광에 가서 영산원 건설에 몇 달 근무했다. 이 무렵 소태산이 이춘풍과 더불어 방언답을 둘러보며 주고받은 문답이 《대종경》 서품 10장이다. 소태산이 1924년(원기9) 변산에서 하산하여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연 뒤 익산본관이 건설되자, 이춘풍은 사가를 내변산으로 옮기고 봉래정사 수호원의 책임을 맡았다. 이어 50세 되던 1925년(원기10)에는 익산 본관으로 나와 전무출신을 단행, 을축 동선(乙丑冬禪)의 여선원(女禪員) 교무로서 부인 회원들을 지도했고, 이어 3회~6회의 여선원 교무로 계속 근무했다. 이춘풍이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이사하여 소태산의 법하에서 공부하다가 전무출신을 단행할 무렵에 평소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유교와 불교의 진리를 놓고 심적 고통을 겪은 것을 털어 놓는다. 이와 관련된 법문이 《대종경》 변의품 20장이다. 이춘풍은 1922년(원기7)부터 6년간 부안 봉래산에 살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연구한 감각감상, 논설, 예문, 서간문 등을 1927년(원기12)에 편집한 《산중풍경(山中風景)》을 남겨 초기교단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게 했다. 이는 《월말통신》, 《사업보고서》가 나오기 이전 교단 창립 제1대 제1회 내 교단관계 자료로서, 한 개인의 관점에서 그때 그때 느낀 바를 진솔하게 기록한 감상담, 서간문, 교리연구 등을 통해 봉래정사 풍경과 총부건설 당시의 풍경 일단과 동지들간의 교리 논쟁 등을 서술하고 있어 교단 창립 제1회 내 발전사를 연구하는데 주요 자료로서 평가되고 있다. 이춘풍은 법명처럼 온순 자애하여 사람을 사귈 때 자신의 이해를 돌보지 않았고 매사에 책임감이 강하고 강직하여 시종이 한결같은 실천력이 있었다. 또한 교단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의견안을 개진하여 불법연구회 총재에 대한 존칭을 ‘종사주(宗師主)’로 통일시켰으며, 지방 교당과 훈련 업무에 종사하는 전무출신에 대해 ‘교무(敎務)’로 호칭을 통일토록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李大進,원불교대사전〉 사진원본코드 : WT1020007-000_043 이춘풍 복원날짜 : 111년 3월 3일 /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칠타원 정세월(七陀圓 鄭世月,1896~1977)
칠타원 정세월(七陀圓 鄭世月,1896~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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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타원 정세월(七陀圓 鄭世月,1896~1977) 서중안 정세월 부부 변산에서 대종사께 하산 간청. 교단연표 : https://wonds.kr/chronology/view.php?id=8&page=1&search=&limit=10 본명은 인흥(仁興). 법호는 칠타원(七陀圓). 불법연구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서중안(秋山徐中安)의 부인. 최초 여자정수위단원 역임. 1896년 1월 26일, 전북 김제군 만경면 인흥리에서 부친 문명(文明)과 모친 이명인화(李明仁華)의 10남매 중 5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천성이 활달하고 근실했으며, 3살 때부터 백부 슬하에서 양육되어 16세에 서중안과 결혼했다. 전처소생의 딸 둘을 친딸과 다름없이 사랑하여 인근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부모를 효양(孝養)하며 하솔의 도도 분명히 하여 가족들이 모두 따랐고 이웃의 모범이 되었다. 1924년(원기9) 불법연구회 창립과 익산총부 건설에 초대회장인 부군과 함께 당시 3천여평의 기지 대금과 건축비 일부(6백여원)를 의연(義捐)했다. 1927년(원기12) 부군과 더불어 가산을 정리하고 교단 창업에 전무하기 위해 총부 구내로 이사했다. 그러나 부군은 우연히 발병하여 효차를 보지 못하고 1930년(원기15) 6월 2일 49세의 일기로 열반했다. 큰 슬픔이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1932년(원기17) 전무출신을 단행했다. 이후 총부식당 주임으로 7년간 알뜰한 공심으로 살림을 꾸렸으며, 1941년(원기26)부터 3년간은 총부 순교로 교화발전에 노력했다. 소태산대종사가 직접 여자정수위단 시보단을 조직할 때 여자정수위단의 일원이 되었다. 8ㆍ15광복 이듬해인 1946년(원기31) 전재동포구호소 주임으로 1년간 구호사업에 종사했으며, 1947년(원기32)부터는 총부 순교로 1년, 총부 내 감원으로 2년, 양로원 주임으로 1년을 일했다. 《회보》 제4호에 ‘공부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의 구별’이라는 감상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35년(원기20) 동선 때는 소태산으로부터 초견성 인가를 받기도 했다. 1954년(원기39) 6월부터는 중앙수양원에 입원하여 수양에 힘쓰다가 1977년(원기62) 열반을 얼마 앞두고 ‘음력 구월 보름경에 가야겠다’고 미리 날을 받아 두더니 과연 9월 13일(양력 10월 25일) 82세로 열반했다.<원불교대사전> 기록물 원본코드 : WT1020007-000_002/복원날짜 : 원기 111년 2월 20일/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추산 서중안 (秋山 徐中安, 1881~1930)
추산 서중안 (秋山 徐中安, 188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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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산 서중안 (秋山 徐中安, 1881~1930) 익산총부 건설의 선구자, 친형 春山 徐東風이 열반하자 친족 친우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大宗師의 신정법례에 따라 거행하여 본교 상장예식의 효시를 이룸. 교단연표 : https://wonds.kr/chronology/?limit=10&search=%EC%84%9C%EC%A4%91%EC%95%88 본명은 상인(相仁). 법호는 추산(秋山). 법훈은 대호법. 1923년(원기8) 입교하여 초대 불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했고, 중앙총부 건설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서중안은 1881년 11월 21일 전북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에서 부친 치욱(致旭)과 모친 반월경화(潘月鏡華)의 11남매 중 넷째 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집안에서 조부에게 글을 익히다가 12세 때 비로소 서당에 나갔는데 가세가 빈한하여 형제가 하루씩 번갈아 나무를 하러 다니며 글공부를 했다. 어릴 적부터 타고난 천성이 인후하고 침착했으며 강직하고 세밀했다. 16세에는 근동의 오씨(吳氏)와 결혼했다. 17세에는 향교 출입을 하며 선비들과 문장을 주고받았고, 만경면 향교의 유사(有司)로 추천되었다. 하지만 서중안은 유학에만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다. 당시 자유평등의 진취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향교책임자로 있을 때 반상차별로 죄 없는 사람을 압박하고 착취하던 폐풍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가문에 내려오던 노비문서를 불살라버렸다. 20세부터는 각처의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다. 서중안은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의서(醫書)를 탐독하며 연구했고 틈만 있으면 서예와 묵화도 그리며 거문고를 뜯기도 했다. 근동에서는 명필,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했다. 28세에는 성덕면장에 추천되어 6년간 근무했는데, 이때 민심이 그를 따랐다. 일제의 압정에서 면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날이 갈수록 가일층 압정을 가하는 일제에게 더 이상 앞잡이 노릇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30세 때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전북 김제군 만경면 인홍리 사람인 정세월(七陀圓鄭世月)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35세에 충남 강경읍에 한약방을 열었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김제면 교동리에 ‘인화당한약방’을 개설했는데, 명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각처에 신용을 얻어 번창했다. 1923년(원기8)에 친형인 서동풍(春山徐東風)으로부터 소태산대종사의 도덕 말씀을 듣고 원불교에 입교했다. 그 당시 여러모로 보아 김제 사회에서 비교적 명망을 갖추고 부유하게 살던 서중안의 입교는 원불교 창립기의 간고한 시절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평소에 종교라면 기피해오던 그였지만 자연 중 마음에 감동된 바 있어 친형의 인도로 험로를 찾아들어 부안 변산 봉래정사에서 새 회상 교법을 초안하며 수양중인 소태산을 뵙게 되었다. 소태산을 만난 서중안은 감복하여 그 자리에서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었으며 하룻밤을 지내고 난 뒤에는 그것도 부족하다하여 소태산보다 10여세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부자지의(父子之義)로서 결연하여 주기를 간청하며 자기 심신의 일체지도권을 소태산에게 일임했다. 그때부터 얼마 후에 부인 정세월과 함께 봉래정사를 다시 찾은 서중안은 소태산에 간곡히 청했다. “상인(중안)이 사뢰었다. 이곳은 도로가 험난하고 장소가 협착하옵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장소가 광활한 곳을 택하여 도량을 정하시고 여러 사람 전도를 널리 인도하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대종사 때가 온 것을 짐작하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나가기는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가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상인이 사뢰었다. 소자 비록 물질이 많지 않고 정성이 부족하오나 능히 담당하겠나이다. 대종사 드디어 허락하시고 이로부터 정식으로 회상 여실 준비를 시작하시었다”(《대종경선외록》 사제제우장18). 소태산은 서중안의 말에 응하여 장차 정식으로 회상을 열 계획을 함께 의논한 후 그 준비에 착수했다. 소태산으로부터 새 회상 공개에 따른 제반 실무를 하명 받은 서중안은 정산종사를 비롯한 수인의 동지와 더불어 그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24년(원기9) 2월에는 소태산 최초의 상경길에 동행하여 소태산이 머물 임시출장소를 서울 당주동에 자비로 주선했다. 그리하여 한 달 동안 곁에 시봉하며 서울의 박사시화ㆍ성성원ㆍ이동진화ㆍ김삼매화 등 중요인연들을 모으는데 힘을 썼다. 1924년(원기9) 3월에 서울을 떠나 전주로 내려온 소태산은 새 회상 공개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4월 29일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날 총회에서 소태산은 불법연구회 총재로 추대되고 초대회장에는 서중안이 선정되었다. 새 회상 공개의 기지를 물색하던 소태산은 8월에 전북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를 기지로 확정했다. 익산총부 건설은 서중안ㆍ정세월 부부가 당시 3,495평 기지의 대금 전부와 건축비 일부를 희사한 것이 그 토대가 되었다. 익산본관인 도치원을 건축할 때에 총부 기지 대금은 물론이요 회관 건축비도 상당 부분 희사했다.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회관 건축 당시 김제 약방에서 불이 났다는 전보를 받고도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다 마치지 못했는데 사사(私事)일에 마음이 끌려 중간에 갈 수 없지요”라 했다. 일을 마치고 약방에 돌아와 보니 방 한 칸 남기지 않고 약방은 다 타버렸다. 화재를 위문하는 친지들에게 “불은 이왕에 난 것이고 공사가 더 중하지. 사람은 주인이고 물건은 끝인데 본말이 바꾸지 않는 이상 걱정할 것 없지”라고 말했다. 1924년(원기9) 12월에 완공된 ‘불법연구회’ 본관은 서중안의 글씨로 기둥에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을 걸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서중안은 공도자숭배의 정신에 입각하여 익산 본관 유지대책을 위한 후원기관으로 장차 약업기관을 경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한약방을 내놓을 작정했으나 양자로 들인 조카가 소유권 분쟁을 일으켜 서중안이 40여년 동안 사회적으로 쌓아올린 인망과 공신력을 실추시켰다. 이 일로 여론이 악화되자 소태산은 서중안을 불러 “공도사업은 재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중안의 그 금강같은 오롯한 마음이 더 중한 것이니 약방을 양자인 조카에게 내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약방을 조카에게 넘겨주었다. 서중안은 46세 되던 1927년(원기12)에는 가산을 정리하고 본교의 사업에 전일하기 위해 총부 구내로 이사했다. 그러나 서중안은 좌절로 인한 발병으로 백방의 치료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부인 정세월과 은법자(恩法子)인 성정철(誠山成丁哲)에게 살아계신 모친의 후사를 부탁한 후 1930년(원기15) 6월 2일 49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서중안의 열반을 추모하는 글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정산종사는 “익산본관이 터도 없을 때에 추산당은 3천여원이란 거액을 의연하여 기초를 구성했으며 오늘날의 발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추산당은 문필이 출중했나니 《수양연구요론》의 표지(추산당의 친필)만 보아도 아는 일입니다. 추산당은 누구에게든지 겸손했으며 하심(下心)을 주장했습니다”라고 추모했다. 송도성은 감상담에서 “굴기하심(屈己下心)이 네 글자 아무라도 말하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추산당께서 능히 이것을 실행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서로 경어를 사용하자는 의견을 추산당이 제의했습니다. 추산당의 몸은 가시었다 할지라도 그 좋은 법만은 가지 않고 길이 우리의 마음속에 잠겨 있으니 우리 남녀노소가 그 법을 모범하여 서로 굴기하심으로 위주하면 떠나신 영가에게 보답이 되는 동시에 본회의 전도가 양양평화할 것입니다”라고 회고하여 그 인품을 그리고 있다. 서중안은 익산총부 건설의 선구자였고 물질적 후원자였다. 기지대금을 쾌척하여 오늘의 중앙총부가 있게 했고 교단의 크고 작은 일에도 힘 미치는 한 자신의 일로 삼은 대공심가였다.<원불교대사전> [관리사항] 기록물 원본코드 : WT1030151-000_199 / 복원기관 : 원불기록관리소 / 복원날짜 : 원기 111년 2월 19일 /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춘산 서동풍 (春山 徐東風, 1868~1925)
춘산 서동풍 (春山 徐東風, 1868~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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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산 서동풍 (春山 徐東風, 1868~1925) 열반 당시 새로운 상장의례의 효시가 되는 인물. 교단연혁 : https://wonds.kr/chronology/view.php?id=13&page=1&search=&limit=10 시창 11년 병인동선 기념 기록사진에서 추출하여 AI복원한 사진으로 원본사진 촬영시기는 시창12년. 대산종사 법문 <원기71년 12월23일> 발췌내용 서동풍 법사도 열반하실 때 서기가 뻗쳤다. 열반을 하시던 날 방문에서부터 서기가 하늘로 뻗쳤다. 그때 법강항마위는 처음 났다. [관리사항] 111.02.11 복원 - 기록물 원본코드 : WT1050062-026 /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111.02.13 정정 - 사진의 인물은 "서중안"이 아닌 "서동풍"으로 밝혀져 수정하였음/고대진

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 1909~1960)-대종사 모신 시절의 모습
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 1909~1960)-대종사 모신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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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1909~1960) 사진설명 : 소태산 대종사, 박허주와 함께 촬영했던 기록 사진을 독사진으로 추출하여 복원한 것으로 남아 있는 사진 중에서 당시 대종사와 함께 있을 시기의 젊은 전음광의 모습이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당시 장례 과정을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본명은 세권(世權). 법호는 혜산(惠山). 법훈은 대봉도. 불법연구회 연구부장, 교무부장, 서무부장, 서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전음광은 1909년 6월 17일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부친 영규(永奎)와 모친 전삼삼(田參參)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평지리에서 쌀 5백석을 추수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전음광은 성격이 활달했으며 두뇌가 치밀하고 명석하여 매사에 준비함이 철저했다. 일찍이 한문공부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1세 되던 해 16세인 권동화(東陀圓權動華)와 결혼했다. 전음광이 소태산대종사를 처음 뵌 것은 1923년(원기8) 1월 모친을 따라 진안 만덕산에 갔을 때였다. 그 후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두 번째로 소태산을 뵙게 되었으며, 마음에 느낀 바 있어 학교를 중퇴하고 전무출신이 되어 소태산을 모시고 다니기로 했다. 모친의 연원으로 입교한 전음광은 소태산을 시봉하며 익산총부 건설에 정성을 다해 조력했다. 모친의 소태산에 대한 신심은 마령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다시 익산총부로 이사하기에 이르렀다. 모친은 소태산의 식사를 전담했고 전음광은 회화ㆍ강연ㆍ상시일기ㆍ감각감상ㆍ심신작용처리건을 소태산에게서 직접 지도받았다. 1926년(원기11) 서무부서기로 임명되어 교무사무를 아울러 5년간 근무했다. 그리고 ‘청년단’을 만들어 일반 청년들의 체육ㆍ음악 등 연예지도를 담당했다. 1932년(원기17)부터 3년간은 연구부장과 교무부장을 지냈고 다시 2년간 교무부장을 맡으면서 총부구내에 야학원을 만들어 100여 명의 아동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지금 우리 교세는 미약하다. 그러나 원대한 계획과 이상과 포부는 어디에도 지지 않는다”는 긍지와 신념으로 신성을 키웠다. 소금에 절인 아카시아 밥도 달게 먹었고, 소태산의 교법이 전 세계 인류의 무상묘법임을 확신하며 미래 세상의 정신적 주인이 될 뜻을 확고히 했다. 전음광은 또한 명쾌한 웅변가였다. 엄격한 형식에 매인 종교인이기보다는 활달하며 정이 있고 멋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소태산과 최초로 은부자(恩父子)의 결의를 맺고 가까이서 시봉을 하며 지도를 받았으며, 소태산의 꾸중과 칭찬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으며 인격을 도야했다. 어느 날 회화에서 공부인과 비공부인의 차이점을 감상 발표하여 대중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대종경》 수행품11). 전음광은 교단의 많은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이기도 했다. 사진사를 직접 집으로 초청하여 1개월간 실지 실습하며, 벽장을 암실로 만들어 필름현상을 할 만큼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교단기관지 발행을 외친 시대감각과 비전을 가진 선각자였다. 1929년(원기14) 7월 《월말통신》 제17호에 기고한 ‘회설’에서 “기관지는 그 사회나 단체의 호흡이다. 시대에 적응한 문물과 사조를 때때로 주입하여 잠자는 자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게으른 자로 하여금 근면하게 하여 그 사회 그 단체의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관지는 난산한 시대사조를 레일 위로 이끌어 가는 기관차’라고 했다. 《회보》 발행의 필요에 대하여는 본교의 힘줄과 피를 잘 활동하게 하는 촉매체로 보고 있다. 전음광의 열정적인 외침으로 1928년(원기13) 5월에 《월말통신》 창간호가 복사판으로 나왔고, 다시 《월보》, 《회보》로 이름을 달리하여 마침내 《원광》으로 되기까지 전음광의 열과 성이 밑받침이 된 것이다. 전음광은 공익사업에도 눈을 돌렸다. 현대는 공익사업을 전개하는 종교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아 《월말통신》 회설을 통해 주장하는 등 교단의 제반문제를 드러내 논리 정연한 문장으로 소태산의 높은 이상과 포부를 대변했다. 어린이 교육을 위한 유아양성소 설치며 유치원 설립, 우리 교법으로 지도할 수 있는 학교 설립, 양로원 개설, 병원 설립, 남자 교역자생활까지 여러 문제와 그 해결방책을 제시했다. 일정(日政)말기 교단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전음광은 일본 경찰과 접촉하여 침착하고도 능란한 말과 글로 그들을 감화시켰다. 이렇게 전음광은 소태산과 교단을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온 공심가였다. 전음광은 광복 이후 교직을 놓고 휴양하다가 1960년(원기45) 7월 21일 52세를 일기로 열반했으며, 장녀 팔근이 전무출신했다. 1985년(원기70) 3월 제103회 수위단회에서는 전음광의 공적을 기려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사상 전음광은 활발한 집필활동을 통해 1928년(원기13)부터 1940년(원기25)까지 12년 동안 《월말통신》, 《월보》, 《회보》의 권두 ‘회설’ 총 95편중 83편을 집필했다. 그중에 몇 편의 회설을 통해 전음광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① 대업을 완성토록 용맹 매진하라:“본회(불법연구회)는 14년의 역사를 가지고 경성, 부안, 영광(영산) 등지에 몇 개의 기초를 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들은 이때에 있어 환희만 할 것도 아니요, 자만할 것도 아니요, 더 한층 용맹매진의 분투력을 발하여야만 창립자인 우리의 떳떳한 의무라 할 것이다.…모든 동지여 서양의 예수는 3년의 전도(傳道)로 동서의 종교계에 패권을 장악했나니 이는 예수의 법을 믿고 활동한 신도들의 악전고투한 결과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종사주(대종사)의 다년간 설법이 계셨고 그 법을 운용할 기관이 대체로 구성이 되었으니 우리의 결심이 굳고 능력이 있다면 우리의 교리와 우리의 사업이 서양인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법을 내심은 종사주(대종사)에게 있고 그 법을 널리 확장할 의무는 우리에게 있나니 우리는 이 의무를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이다”(《월말통신》 제12호). ②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사람의 정신은 하나라 하겠지만 그 정신을 운용하는 방면에 따라서 기술적 정신과 도덕적 정신의 양 방면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현대 사람들은 모든 물질을 발명하고 제도하는 기술적 정신은 한량없이 개벽되어가고 있으나 그 물질을 구하고 사용하는 도덕적 정신은 아직도 개벽되지 못했으므로 이 구하는 정신과 사용하는 정신을 개벽시키자는 것이다.…현대는 진기한 물질이 발명될수록 그 발달된 기술과 무기를 이용하여 범죄자는 나날이 증가하며 인류생활은 잔혹한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그 발명된 물질을 자기의 이욕을 얻고자 하는데 사용하는 까닭으로 그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이 개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용하는 정신을 개벽시키자는 것은 정당한 교법으로 사람을 교화하여 불의는 죽어도 행치 아니하고 정의는 죽어도 행하는 실행공부를 시켜서 불의한 곳에는 그 물질을 사용치 않게 하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저 사람도 이롭고 나도 이로운 자리이타의 곳에만 그 물질을 사용하도록 정신을 개벽하자는 것이다. 그리한다면 물질문명이 인류생활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韓正釋〉<원불교대사전> 교단연혁 : https://wonds.kr/chronology/view.php?id=8&page=1&search=&limit=10 [관리사항] 111.02.10 원본코드 : WT1030254-000_7 / 복원기관 : 원불교 기록관리소

주산 송도성 ( 主山 宋道性, 1907~1946)
주산 송도성 ( 主山 宋道性, 1907~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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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 송도성 종사 ( 主山 宋道性, 1907~1946) AI 보정 사진 원기 7년 음력 11월 1일 소태산 대종사 변산에 계실 때 출가시 올리고 출가한 인물이다. 본명은 도열(道悅). 호는 직양(直養). 법호는 주산(主山). 법훈은 종사. 정산종사의 동생이다. 영산지부장겸 교무, 총부교무, 총무부장, 교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송도성은 1907년 12월 23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서 부친 벽조(久山宋碧照)와 모친 이운외(準陀圓李雲外)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야성(冶城). 조선 명종 때의 명신인 송희규(宋希奎)의 14세손으로, 그의 선조들은 이웃 마을 고산동에서 4백여 년 동안 단일씨족으로 효행과 학문을 빛내며 살아왔다. 그의 일가가 소성동으로 이사한 것은 부모가 결혼한 후 얼마 지나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정직하고 정의감이 투철했으며, 4세 때부터 조부 송훈동으로부터 한학을 익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쳐 신동으로 불렸다. 종친인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 송준필(恭山宋浚弼)도 일찍이 문리를 얻은 송도성을 보고 장차 그 대성을 예언한 바 있었다. 친형인 정산은 1918년(원기3) 7월 방언공사가 한창일 때 영산성지로 가서 수위단 중앙단원이 되었다. 이어 부친인 송벽조는 영산성지를 찾아 소태산께 귀의했고, 1919년(원기4) 9월에 전 가족이 영광으로 이사하여 군서면 학정리 신촌에 정착했다가, 1924년(원기9)에 길룡리로 옮겼다. 송도성은 13세에 소태산을 처음 뵙고, 법문을 들은 자리에서 곧 제자되기를 청했다. 이를 기특히 여긴 소태산이 ‘네가 어떻게 그런 마음이 났느냐’고 묻자 송도성은 ‘마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넓고 큰 것이니 정신을 수련하여 지극히 큰마음을 확충하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어 소태산이 ‘네가 도의 성품을 알았구나. 앞으로 도성(道性)이라 이름하거라’ 하며 법명을 지어주었다. 송도성이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살기는 14세 때 영광으로 이사한 후 반년쯤 지나서였다. ‘도성이 하고 길선이를 한번 바꿔서 가르쳐봅시다’ 하고 어른들 사이에 이야기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그 후 1928년(원기13) 22세시에 결혼했다. 송도성은 1922년(원기7) 16세 때 부안 변산에 주석하며 교법을 초안하던 소태산에게 “마음은 스승님께 바치고 몸은 이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껏 굴려 영겁토록 쉬지 않게 하리라(獻心靈父 許身斯界 常隨法輪 永轉不休)”는 출가시를 바치고 전무출신했다. 석두암에서 여섯 동지와 더불어 소태산을 모시고 낮에는 산전(山田)을 개척하여 생활의 근거를 삼고 밤이 되면 법석에 참석하여 법을 듣고 즐겁게 살았다. 법설내용은 대개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는 방법을 설했는데 송도성은 이 법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1924년(원기9)에는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개최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후, 익산총부건설에 혈성을 다했다. 1925년(원기10) 4월 정수위단 보궐 및 대리조직 시 이순순(二山李旬旬)의 대리로 수위단 감방(坎方)단원이 되었다. 1926년(원기11)에는 서울출장소 초대교무로 파견되어 1년간 서울교화의 기틀을 다졌으며, 1927년(원기12)에는 다시 총부 서무부 서기로 봉직했다. 1928년(원기13)에는 연구부 서기로 전임되어 교단 최초의 월간지인 《월말통신》을 간행했다. 의로움에 찬 붓으로 날카로운 시대감각을 가지고 회중(會衆) 내의 상황보고와 현실에 적절한 소태산의 법설을 기재하여 회원들의 공부방향의 지침서로 삼게 했다. 회원들의 공부 발표와 각지 예회상황을 기록하여 교단사의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1929년(원기14)에는 정식 수위단원이 되었고, 1930년(원기15)에는 교무부장의 중책을 맡아 《월말통신》을 발전시켜 《월보》를 간행했다. 1932년(원기17)에는 영광(영산)지부 교무부장 겸 지부장으로 발령되어 한발과 폭염으로 인한 극심한 재해를 극복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37년(원기22)에는 교정원장에 임명되었고 교무부장과 감찰부장까지 겸하여 교단 발전에 혼신의 정열을 다했다. 1939년(원기24)에는 총부 교감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경진년의 동선(冬禪)에 심혈을 기울여 법풍을 진작시켰다. 교법실현에 앞장서 상시일기와 정기일기며 매일 좌선시간에는 부동의 자세로 진경에 드는 모습을 학인들에게 전수시켰다. 동ㆍ하선의 전후에는 상설학원 체제로 이끌어 학원생에게 교단의 주인정신과 신심을 심어주기 위해 일일이 개인지도에 전념했다. 그때 학원생이었던 제자들 중에는 송도성의 따가운 회초리가 약이 되고 거름이 되어 교단의 중심 인재가 되었다. 1942년(원기27)에는 다시 영광(영산)지부 교감 겸 지부장을 역임했다.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의 열반을 당하여 비통한 가운데 수위단 중앙단원에 피선되어 정산을 보필했다. 1945년(원기30)에는 총무부장에 부임했다. 1945년(원기30)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전재민 구호사업회를 발기해 서울ㆍ익산ㆍ전주ㆍ부산 등지에서 일본ㆍ만주ㆍ중국 등 해외에서 귀환하는 전재동포구호사업(戰災同胞救護事業)을 전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다했다. 고아원인 보화원을 설립하여 교단 자선사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교단의 지도자였던 송도성은 전재동포구호사업에 몰두하던 중 이재민의 전염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채, 교단의 중대현안을 의논하기 위해 총부에 내려오다 건강이 악화된 후, 1946년(원기31) 3월 27일 40세를 일기로 소태산의 게송을 암송하면서 열반했다. 작은 키에 위용과 정열에 넘치는 모습,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송도성은 교단 창업기의 기둥으로서 괄목할만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6년(원기31) 4월 그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된 금강청년단(金剛靑年團)은 뒷날 원불교청년회의 모체가 되었다. 특히 청년지도와 후진양성에 열과 성을 다했으며 자신 수행에도 철저했다. 서예와 달마상(達摩像) 그리기에 능했으며 진보주의자로서 패기에 넘친 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각 종교의 경서(經書)에 통달하는 지혜와 신구학문을 이해하는 지식에 이르기까지 걸리고 막히는 바가 없었고, 신문ㆍ잡지ㆍ문학서적을 보고 아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문필에도 능하여 ‘오, 사은이시여’ㆍ‘진경(眞境)’ㆍ‘적멸(寂滅)의 궁전(宮殿)’을 비롯하여 많은 시가(詩歌)와 논설을 남겼다. 1954년(원기39) 4월 제2회 수위단회에서 송도성을 출가위로 추존하고, 1957년(원기42) 종사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1991년(원기76) 3월 제11회 수위단회에서는 소태산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봉찬대회를 맞아 송도성의 법위를 ‘대각여래위’로 추존했다. <원불교대사전> [관리사항] 111.02.09 복원 - 원본코드 : WT1020043-000_298 /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대종사 최초 일원상 그린 장소
대종사 최초 일원상 그린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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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 4년(1919) 소태산 대종사 최초로 일원상을 그려보인 곳 장소 : 김제 금산사 송대 관련기록 : https://wonds.kr/chronology/view.php?id=4 [관리사항] 000.00.00 원본 - 교정원 문하사회부 성적지 조사사진-나무에 가려 복잡하고 저해상도 미등록 사진. 111.01.30 복원 - 원기 87년 건물 복원 전 촬영된 사진을 기록관리소에서 AI 이미지 복원/원불교 기록관리소

만덕산 초선지 옛 모습
만덕산 초선지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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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 초선지 (옛 만덕암 터) 만덕산 초선지 : 만덕산 초선지는 좌포에 사는 김 승지(乘志)가 1910년경에 부종병으로 고생하는 며느리 이현공을 위해 지어 준 3칸 기와집이 있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만덕암에서 3개월을 적공하였고, 원기 9년에는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12명의 제자와 한 달 동안 선(禪)을 났다. <2009,원불교기초이해> 만덕산성지 : 만덕산성지(萬德山聖地)는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만덕산 남쪽 기슭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원불교가 만덕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원기 6년 변산 봉래정사에서 정산종사가 소태산 대종사에게 “어디든지 네 발 걸음 내키는 대로 가 보아라”는 말씀을 받들고 길을 가던 중 만덕산 북쪽에 위치한 미륵사 주지를 만나 미륵사에서 겨울 한 철을 지내면서 부터다. 정산종사가 미륵사에서 화주인 최도화를 만난 후 정산종사가 미륵사를 떠나고 없자, 최도화는 정산종사를 찾아 봉래정사까지 왔다가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소태산 대종사는 만덕산 만덕암에서 최도화의 주선으로 원기 7년 말부터 3개월을 머물며 적공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9년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만덕산을 다시 찾아 몇몇 제자와 선(禪)을 나자, 최도화의 인도로 만덕산 아래 좌포에 사는 노덕송옥이 11살 된 장손자인 김대거(대산종사)를 데리고 귀의하였고, 서울에서 제자가 된 이동진화는 김삼매화와 함께 찾아왔다. 그리하여 경상도 성주의 송규(정산종사)와 영광의 오창건·김광선, 진안의 최도화·노덕송옥·김대거, 전주의 전삼삼·전음광·이청춘, 서울의 박사시화·이동진화·김삼매화 등 12명의 제자와 원기 9년 (음) 5월 한 달 동안 김광선의 주관으로 선(禪)을 났다. 이를 일러 원불교에서는 만덕산 초선회(初禪會)라 한다. 만덕산 만덕암은 소태산 대종사 → 정산종사 → 대산종사로 이어지는 원불교의 3대 주법(主法)이 최초로 만난 역사적인 곳이다.<2009,원불교기초이해> [관리사항] 111.01.26 복원 - 원본코드 : W1001208P0552 185_만덕산 김씨 산제당 터(만덕암) / 원불교기록관리소 소태산 대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 간행물에 실려있는 흐믜한 사진으로 AI복원한 사진으로 원불교 최초의 선을 났던 장소로 건물은 사라지고 없던 때 촬영 된 것으로 현재로선 가장 오래 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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