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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기록 표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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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함 | 방언공사 (防堰工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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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록관리팀 작성일18-12-26 13:43 조회11,8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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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방언공사 (防堰工事)

▣ 부제 : 영산방조제공사 / 간척사업(干拓事業)
▣ 날짜 : 1918 (시창 3년 5월 13일/음4월4일)~ 1919 (시창 5년 4월 26일/음 3월 36일)
▣ 내용 : 원불교 교단 초기인 1918년(원기3)부터 1년간 소태산대종사와 제자들이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앞 해안 갯벌을 막아 농토를 만든 공사. 이 공사로 교단 창립의 물질적 토대 마련, 영육쌍전의 정신실현과 무시선 무처선의 수행정신 확립, 단결과 화합의 정신구현, 공익정신 배양 등 원불교의 정신적ㆍ물질적 기본 터전을 닦는 계기가 되었다.

▣ 참고 : 방언공사 과정
소태산은 대각 후 제자들과 교단 창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했으며, 이러한 노력의 하나가 길룡리의 간척개간이라는 방언공사였다. 방언공사는 1918년(원기3) 3월에 시작되었으며, 당시 간척사업으로서 바다를 막아 언답을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언답을 쌓는 중장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로서 많은 노동력을 요하고, 또한 간척의 경비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초기교단의 운영과 방언공사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소태산은 창립제자들과 함께 저축조합을 설립하고 금주금연과 허례폐지를 시행했다.

이러한 일을 통해 저축 금액이 2백여원에 이르렀고 소태산 자신도 가산을 정리한 400원, 그리고 인근 부호에게 400원을 대부받아 총 1,000원의 자금을 마련했으며, 모인 돈으로 목탄을 구입했는데, 마침 목탄 시세가 올라 8,000~9,000원의 자금을 확보했다. 자금이 어느 정도 확보되자 방언공사를 결심하고 소태산을 따르던 창립제자들은 천지신명께 서약을 올린다.

“우리들은 다행히 대도대덕의 초창 시대를 당하여 외람히 단원의 중한 책임을 맡았는 바, 마음은 한 사문(師門)에 바치고 몸은 공중사에 다하여 영원한 일생을 이에 결정하옵고 먼저 방언공사를 착수하오니 오직 여덟 몸이 한 몸이 되고 여덟 마음이 한마음이 되어 영욕고락에 진퇴를 같이하며 비록 천신만고와 함지사지를 당할지라도 조금도 퇴전치 아니하고 후회치 아니하고 원망치 아니하여 종신토록 그 일심을 변하지 않기로서 혈심 서약하오니 천지신명은 일제히 통촉하사 만일 이 서약에 어긴 자 있거든 밝히 죄를 내리소서”(《불법연구회창건사》 제11장).

소태산의 창립제자들은 이 서약을 마치고 다음날 즉시 비장한 결심으로 방언공사에 착수했다. 이에 소태산은 방언공사를 시작하여 감역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 9인은 본래 일을 아니하던 사람들이로되 대 회상 창립 시기에 나왔으므로 남다른 고생이 많으나 그 대신 재미도 또한 적지 아니하리라”(《대종경》 서품8)고 했다. 소태산은 일부 제자들에게는 새끼를 꼬게 했고, 다른 제자들에겐 말뚝으로 사용할 나무를 베어오게 하는 등 간척사업의 방축선을 정하고 방축재료는 갯벌 흙을 사용했다.

작업에 필요한 연장은 가래나 삽을 사용했으며 운반은 달구지나 지게, 망태기로 했다. 이처럼 힘겨운 방언사업을 시작한 지 1년만에 준공이라는 교단사적 업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마을 앞의 간척지를 개간하여 2만 6천여평의 농토를 얻게 되었으니, 이는 초기교단의 기초가 되는 귀중한 토지가 되었으며 소태산과 제자들이 합심 노력한 결정체였다. 간척을 통해 얻은 농토는 ‘정관평’이라 했다. 1919년(원기4) 3월 방언의 준공을 마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옥녀봉 기슭 바위 상단에 성업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새겼다.

이를 ‘제명바위’라고 하는 바, 약 3m 높이의 자연석 바위에 시멘트를 판처럼 바르고 간척공사 기간과 참여자 이름을 새겼다. 크기는 가로 80cm 세로 40cm에 오른쪽에서부터 한자 세로글씨로 “영광 백수 길룡(靈光白岫吉龍) 간석지 양처(干潟地兩處) 조합원 설시원(組合員設始員) 박중빈(朴重彬) 이인명(李仁明) 박경문(朴京文) 김성섭(金成燮) 유성국(劉成國) 오재겸(吳在謙) 김성구(金聖久) 이재풍(李載馮) 박한석(朴漢碩) 대정7년 4월 4일 시(大正七年四月四日始) 대정8년 3월 26일 종(大正八年三月二十六日終)”이라 음각했다.

방언을 준공하자 한일합방 10년만에 한민족의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원기4) 3ㆍ1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독립만세 소리는 “개벽을 알리는 상두소리니, 바쁘다 어서 방언 마치고 기도드리자”(《정산종사법어》 국운편3)라고 하며 법인기도를 올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방언공사의 정신
영광 길룡리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간척사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주위에서 비평과 조소가 난무했다. 교단 창립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간척사업에 중장비도 없이 괭이와 삽뿐인 기구를 동원하여 한줌 한줌 흙더미를 일렬로 줄을 서서 건네줌으로써 언을 쌓아나갔던 것이다. 더욱이 방언기간 동안 조수간만의 차가 심했다. 한 달 가운데 사리기간인 보름 동안은 공사를 계속할 수 없었고, 인부가 많을 때는 하루 50여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품삯이 많이 지출되었다.
사실 조수 간만의 차와 태풍, 홍수 등으로 둑이 일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지만 일심합력의 정신으로 진력을 다했다.

한번은 방언의 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김광선이 언답을 둘러보던 중 제방에 구멍이 뚫려 바닷물이 흘러드는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몸을 던져 물구멍을 막았던 일도 있었다. 언답의 조그만 구멍이 커져 무너지려는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구멍을 막았던 정신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교단을 위하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방언공사를 진행하던 중 인근의 부호 한 사람이 분쟁을 일으켜, 관청의 허가를 받아 간척한 땅을 차지하려고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조합원들의 결실로 이루어진 언답을 빼앗을 욕심으로 간석지 대부(貸付)원서를 쌍방 제출한 후, 이 토지권이 장차 자기의 소유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제자들이 낙심하며 그 부호를 원망하자, 소태산은 제자들에게 “공사 중에 이러한 분쟁이 생긴 것은 하늘이 우리의 정성을 시험하려 하심인 듯하니, 제군은 조금도 거기에 끌리지 말고 또는 저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지도 말라. 일은 반드시 바른 대로 돌아오는 것이 이치의 당연함이어니와 설령 우리의 노력한 바가 헛되어 저 사람의 소유로 된다 할지라도 우리에 있어서는 양심에 부끄러울 바가 없으며, 또는 우리의 본의가 항상 공중을 위해 활동하기로 했으니 비록 처음 계획과 같이 대중을 위해 사용하지는 못하나 그 사람도 또한 대중 중 한 사람은 되는 것인즉 다못 한 사람에게라도 그만한 이익을 주지 않는가”(《대종경》 서품9)라고 했다.


방언공사의 의의
하루는 이춘풍이 와서 소태산을 뵈오니, “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 것은 도덕을 배우려 함이어늘, 나는 무슨 뜻으로 도덕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이같이 언을 막으라 했는지 아는가”(《대종경》 서품10)라고 물었다. 초기교단의 창립정신을 깊이 새겨보라는 의미로서 방언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과제를 던져준 것이다. 방언공사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방언을 통해 초기교단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여 공부하는 비용을 준비하게 하고, 동심합력으로 나아가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함이다. 일심합력을 통해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시와 종을 일관하는 성취감을 갖게 해주자는 것이다.

② 제자들의 굳은 신심이 있고 없음을 알기 위함이다. 험난한 방언공사를 전개하면서 도덕을 공부하러 온 사람들의 신심 정도를 파악하는 지렛대로 삼은 것이다. 이웃 사람들의 조소를 받으며 노동의 경험도 없는 사람들로서 힘에 부치는 힘든 일을 하게 하는 것으로 제자들의 참된 신심이 있고 없고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③ 근로사업으로 자작자급의 방법을 보아서 복록이 오는 근본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방언답을 완성함으로써 여기에 곡식을 심어 식량을 확보하는 것은 인과의 차원에서도 분명한 것으로 노력을 하면 그만큼 결실이 온다는 복록의 소종래를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당시 미신적 요행이나 걸식과 같은 구습을 타파하기 위한 소태산의 염원이기도 했다.

④ 앞으로의 종교는 노동을 중시하여 영육을 쌍전하고 이사를 병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저축조합과 방언공사 등을 통하여 특별한 노력과 근로가 아니면 사업의 토대를 세우기 어렵다고 하며 공동출역을 하게 한 것이나, 간석지의 방언공사를 한 것은 과거종교의 정적 수행을 벗어나 도학과 과학을 병행하고 동과 정, 영과 육을 병행하게 한 것이다.

⑤ 방언공사는 개척정신과 공익정신을 심어주고 있다. 1990년(원기75) 3월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원불교는 ‘새로 일어난 종교’란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원불교에서는 교도들과 함께 간척사업을 통하여 자립하는 생활과 공익정신을 실천하고, 앞으로 다가올 문명한 시대에는 우리 민족이 정신적으로 세계를 이끄는 국민이 될 것을 예시함으로써 일본의 지배를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고 했다. 방언공사가 국토개간을 통한 사회공익에 기여한 점이 높이 살 만하다는 것이다.

⑥ 무엇보다도 방언공사의 의의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창립정신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일심합력과 근검절약ㆍ무아봉공 등의 정신으로 창립기의 저축조합과 방언공사의 결실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방언공사에서 일심합력이라는 원불교의 창립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柳聖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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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력사항
20160507 구 웹사이트 등록/고대진

20181226 이전 등록/고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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