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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기록 표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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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함 | 첫 교화단 조직( 교조의 구인단원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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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록관리팀 작성일18-12-26 13:29 조회12,4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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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구인단원 조직(첫 교화단 조직)
▣ 날짜 : 1917 ( 시창 2년 9월 12일/음 7월 26일)
▣ 내용 : 소태산대종사의 첫 표준 제자 아홉 사람. 일산 이재철(一山李載喆), 이산 이순순(二山李旬旬), 삼산 김기천(三山金幾千), 사산 오창건(四山吳昌建), 오산 박세철(五山朴世喆), 육산 박동국(六山朴東局), 칠산 유건(七山劉巾), 팔산 김광선(八山金光旋), 정산종사(鼎山宋奎) 등이다. 원불교 교단은 이들을 구인선진(九人先進)이라 부르기도 한다.

▣ 참고 : 구인제자의 구성
소태산은 1916년(원기1) 대각을 이루고, 개교표어와 최초법어를 발표한 후, “이제 나의 안 바는 곧 도덕의 정체(正體)요, 나의 목적하는 바는 곧 새 회상을 이 세상에 창건하여 고해에 빠진 일체중생을 낙원으로 제도하자는 것이나, 내가 몇 달 전까지도 폐인으로 평을 받았고 일찍이 도가(道家)에 출입하여 본 바가 없었으며, 현하(現下) 민중은 실생활의 정체를 모르고 허위와 미신에만 정신이 돌아가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도(道)를 얻기 전에는 도를 얻지 못함으로써 한(恨)이더니 도를 얻은 후에는 믿어주는 동지가 없음으로써 한이로다”(《불법연구회창건사》 제8장)라고 하며 때를 기다렸다.
소태산의 대각 전 후 시기에 증산교파가 사방에서 일어나 모든 인심을 충동하던 중,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부근에도 전파되었다. 소태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방편으로 여러 사람의 단결과 신앙을 얻은 후 정도를 따라 차차 정법교화를 하리라” 결심하고 치성(致誠)하는 절차를 물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특별한 정성으로 7일 치성을 올렸다. 이에 보통 생각으로는 가히 추상할 수 없는 말과 태도로 좌우 사람의 정신을 황홀케 하니 몇 달 안되어 인근 각처에서 믿고 따르는 사람이 40여 명에 달했다.
소태산은 40여 명의 신자들과 서로 내왕한 지 4~5개월이 되었으나 그들은 대개 일시적 허영심으로 모였고, 또는 그동안 어떤 통제 있는 생활을 하여본 바가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지라, 그들을 일률 지도할 생각을 뒤로 미루고, 그해 12월경, 그중에서 특별히 진실하고 신심 굳은 여덟 사람을 먼저 선택하니, 곧 이재철ㆍ이순순ㆍ김기천ㆍ오창건ㆍ박세철ㆍ박동국ㆍ유건ㆍ김광선 등이었다. “원기 2년 7월에 대종사께서 이 회상 최초의 단(團)을 조직하실 제 먼저 8인으로 8방의 단원만 정하시고 중앙위는 임시로 대리케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자리에는 맞아들일 사람이 있느니라’ 하시고 기다리기를 마지아니하시더니, 드디어 정산종사를 맞아 중앙위를 맡기시니라”(《정산종사법어》 기연편1).
이때가 1918년(원기3) 7월경이었다. 소태산은 이들 아홉 제자와 더불어 세계의 모든 사람을 두루 교화하기 위한 교단 최초의 십인일단(十人一團)을 조직했다. 구인제자의 출생지는 정산을 제외한 8인이 모두 소태산의 동향인 전남 영광이요, 정산만 유독 경북 성주이다. 소태산과 구인제자의 인연 관계를 살펴보면, 박세철은 족질(族姪)이요, 박동국은 친동생이며, 유건은 외숙(外叔)이요, 김광선은 유시로부터 소태산과 교의(交誼)가 두터운 의형제요, 이순순ㆍ김기천ㆍ오창건은 근동 지우(近洞知友)이며, 군서 사람 이재철은 오창건의 인도로 제자가 되었고, 정산은 스승을 찾아 구도 행각(求道行脚)을 하고 있을 때 소태산이 전북 정읍 화해리(花海里)를 찾아 친히 맞이했다.
소태산과 구인제자의 나이를 비교해 보면, 박세철, 이순순, 김광선 등은 소태산보다 12년 연상이요, 유건은 11년, 오창건은 4년, 김기천은 1년 연상이다. 이재철은 동갑이며, 박동국은 6년, 정산은 9년 연하이다. 따라서 스승인 소태산보다 연하인 제자는 박동국과 정산 둘뿐이요, 그중 정산이 가장 나이가 적다. 체격과 용모를 살펴보면, 박세철과 정산이 키가 작고, 나머지 7인은 모두 키가 컸으며, 특히 김광선과 김기천은 소태산과 더불어 키가 상당히 큰 인물이었다.
또한 오창건과 박동국은 용모가 소태산과 닮았으며, 오창건ㆍ유건ㆍ김광선 등은 기력이 장대했다. 소태산과 구인제자의 열반순서를 보면, 박세철ㆍ김기천ㆍ김광선ㆍ이순순ㆍ소태산ㆍ이재철ㆍ박동국ㆍ오창건ㆍ정산ㆍ유건으로 9인 중 박세철이 제일 먼저, 유건이 제일 나중에 열반했다. 구인제자들은 스승인 소태산을 만나 새 회상 원불교 창업에 무아봉공(無我奉公)하고 인격을 수련함으로써 만인의 존모를 받는 창립주들이다. 이들 중 이순순ㆍ박동국ㆍ유건 3인이 소태산의 명으로 재가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저축조합ㆍ방언공사ㆍ혈인기도 등에 모두 동참하여 회상 창립의 기초를 다진 대공덕주들이 되었다.

구인제자의 역할
구인제자는 소태산과 더불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일치단결하여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초기교단사를 형성했다. 교단 창립과정에서 9인의 역할은 영산에서의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는 물론, 변산에서의 봉래제법(蓬萊制法)과 익산에서의 총부 건설, 지방 교화로 이어졌다.
① 최초의 단조직:소태산은 십인일단의 조단법(組團法)에 의해 1917년(원기2) 7월 26일에 교단 최초의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했다(《원불교교사》 제1편 제3장).
“대종사, 최초의 단을 조직한 후 단원들의 신성이 날로 전진은 하나, 아직도 마음에 원하는 바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결이며, 난칙한 신통 묘술이며, 수고 없이 속히 되는 것 등이요, 진리의 당체와 인도(人道)의 정의(正義)를 분석하는 공부는 원하지 아니함을 보고, 종종 하늘에 제사하여 그 마음을 결속케 하고, 친히 지도할 말씀도 천제(天帝)의 말씀이라 하여 그 실행을 권면했다. 그 후, 차차 법을 정하여 매월 예회 보는 법을 지시하니, 곧 삼순일(三旬日, 1일ㆍ11일ㆍ21일)에 모이되, 신(信)을 어긴 이는 상당한 벌이 있게 하고, 또는 《성계명시독(誠誡明示讀)》이라는 책을 두어, 단원들의 10일 동안 지낸 마음을 청ㆍ홍ㆍ흑점으로 조사하여, 그 신성 진퇴와 실행 여부를 대조케 하니, 단원들은 한편 두려워하고 한편 기뻐하여, 그 마음의 결합됨과 신성의 철저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원불교교사》 제1편 제3장).
② 저축조합(貯蓄組合):소태산은 1917년(원기2) 8월에 제자들과 함께 회상 기성(期成)의 한 기관인 저축조합을 창설하고 단원들에게 “우리가 장차 시방세계를 위해 함께 큰 공부와 사업을 하기로 하면, 먼저 공부할 비용과 사업할 자금을 예비해야 하고, 예비하기로 하면 어떤 기관과 조약을 세워야 할 것이므로, 이제 회상 기성의 한 기관으로 저축조합을 설치하여 앞일을 준비하려 하노라”(《원불교교사》 제1편 제4장)고 밝힌 후 “우리가 시작하는 이 사업은 보통 사람이 다 하는 바가 아니며, 보통사람이 다 하지 못하는 바를 하기로 하면 반드시 특별한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인바 우리의 현재 생활이 절약과 근로가 아니면 사업의 토대를 세우기 어려운 터이니, 우리는 이 조합의 모든 조항을 지성으로 실행하여 이로써 후진에게 창립의 모범을 보여 주자”(《대종경》 서품7)고 당부했다.
“이에 모든 단원이 술ㆍ담배를 끊어 그 대액(代額)을 저축하며, 의복ㆍ음식 등에 절약할 정도가 있으면 그 대액을 저축하며, 재래의 여러 명절 휴일을 줄여 특별 노동 수입을 저축하며, 각자 부인에게도 끼니마다 시미(匙米, 후일 보은미)를 저축케 하며, 그간 실행해 온 천제(天祭)도 폐지하여 그 소비 대액을 저축하기로 하고, 대종사, 친히 조합장이 되어 그 실행을 장려하시니, 불과 몇 달에 저축된 금액이 상당한 액수(2백여원)에 달했다. 대종사는 조합원들에게 명하여 그동안의 저축금으로 숯을 사두라 하시고, 한편으로는 이웃 마을 부호 한 사람에게 빚(4백원)을 얻으며, 대종사께서 그간 준비해두신 사재(4백원)도 판출 제공하사 다 숯을 사두게 하시니, 7ㆍ8개월 후 그 값이 일약 10배로 폭등하여 조합은 1년 안에 큰 자금을 이루게 되었다. 대종사의 사재는 대각 이후에 본댁에 남아 있는 가구 등속을 매각 작전(賣却作錢)하여 운용 조성한 것이요, 빚은 당시 조합의 신용으로는 얻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대종사께서 명령하신 다음날, 부호가 자진하여 빚을 주었다. 조합원들은 뜻밖의 성공에 기뻐하는 동시에, 이것은 아마 하늘이 우리 사업을 도와주심이라 하여 더욱 신심과 용기를 얻게 되었고, 숯 무역은 제1차 대전으로 숯 시세의 일대 변동을 당하여 그러한 이익을 보게 되었다”(《원불교교사》 제1편 제4장).
저축조합운동은 원불교 교단 창립의 경제적 기초 확립에 큰 힘이 됨과 동시에 인간개조, 생활개혁, 사회개조 등의 신생활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모든 단원이 금주단연ㆍ허례폐지ㆍ공동노동ㆍ시미납부ㆍ소비절약ㆍ근검저축 등의 방법으로 조합기금을 모아 숯장사를 했으며, 거기서 나온 자본으로 바로 방언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③ 방언공사(防堰工事):소태산은 1918년(원기3) 3월에 저축조합을 통해 조성된 기금을 바탕으로 구인제자와 함께 조수(潮水) 내왕하는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앞의 버려진 간석지(干潟地)를 막아 논을 만드는 정관평(貞觀坪) 방언공사를 착수했다. 소태산은 길룡리 앞 바닷물 내왕하는 간석지를 가리키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버려둔 바라. 우리가 언을 막아 논을 만들면 몇 해 안에 완전한 논이 될뿐더러 적으나마 국가 사회의 생산에 한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개척 사업부터 시작하여 처음부터 공익의 길로 나아감이 어떠하냐”(《원불교교사》 제1편 제4장)고 했다.
조합원들은 원래 신심이 독실한 중에 몇 번의 증험도 있었으므로 소태산의 말에는 다른 사량계교를 내지 아니하고 오직 절대복종했다. 이에 일제히 명을 받들어 오직 순일한 마음으로 지사불변(至死不變)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다음날로 곧 방언공사에 착수했다. 조합원들이 공사에 착수하니, 근방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냉소하거나 성공치 못할 것을 단언하며 장담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그 비평 조소에 조금도 끌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용기를 내고 의지를 더욱 견고히 하며 일심합력으로 방언공사를 계속해 나갔다.
평소 노동의 경험이 없는 조합원들이었으나 삼복성염(三伏盛炎)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삭풍한설(朔風寒雪)에는 추위를 헤치면서, 한편은 인부를 독촉하고 한편은 직접 흙짐을 지면서, 조금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아니 했다. 또한 단원들이 방언 일을 진행할 때에 이웃마을 부호 한 사람이 이를 보고 곧 분쟁을 일으키어 자기도 간석지 개척원을 관청에 제출한 후 관계당국에 자주 출입하여 장차 토지소유권 문제에 걱정되는 바가 적지 아니한지라 단원들이 그를 깊이 미워하거늘, 소태산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이치의 당연함’(《대종경선외록》 초도이적장)을 강조하고 “오직 공중을 위하는 본의로만 부지런히 힘쓴다면 일은 자연 바른 대로 해결되리라”(《대종경》 서품9)고 했다.
과연 이 일은 결국 사필귀정으로 해결되었다. 그해 12월에 옥녀봉(玉女峰) 아래에 조합실인 구간도실(九間道室)을 준공하여 주경야독의 생활을 하며 공사를 계속 진행, 1919년(원기4) 3월에 준공하니 공사 기간은 만 1년이요, 간척농토 면적은 2만 6천평이었다. 이는 오직 소태산의 탁월한 영도력과 조합원들의 일심합력으로써 영육쌍전의 실지 표본을 보이고, 새 회상 창립의 경제적 기초를 세운 일대 작업이었다.
④ 혈인기도(血印祈禱):1919년(원기4) 3월, 방언공사를 마친 후 소태산이 구인제자에게 “지금 물질문명은 그 세력이 날로 융성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은 쇠약하여, 개인ㆍ가정ㆍ사회ㆍ국가가 모두 안정을 얻지 못하고, 창생의 도탄이 장차 한이 없게 될지니, 세상을 구할 뜻을 가진 우리로서 어찌 이를 범연히 생각하고 있으리요. 옛 성인들도 창생을 위해 지성으로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天意)를 감동시킨 일이 없지 않나니, 그대들도 이때를 당하여, 전일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모든 사람의 정신이 물질에 끌리지 아니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기도하여 천의의 감동이 있게 하여 볼지어다. 그대들의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라, 마음이 한번 전일하여 조금도 사(私)가 없게 되면 곧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여 모든 일이 다 그 마음을 따라 성공될 것이니, 그대들은 각자의 마음에 능히 천의를 감동시킬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각자의 몸에 또한 창생을 제도할 책임이 있음을 항상 명심하라”(《대종경》 서품13)하니, 구인은 황송하고 기쁜 마음으로 일제히 지도받기를 청했다(《원불교교사》제1편 제4장).
이에 3월 26일에 시작하여, 10일간 재계(齋戒)로써 매 삼륙일(每三六日) : (6일ㆍ16일ㆍ26일)에 기도식을 거행했다. 7월 16일에 이르러, 소태산은 단원들에게 “그대들이 사실로 인류 세계를 위한다고 할진대, 그대들의 몸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 없이 그 일을 실행하겠는가”(《원불교교사》 제1편 제4장) 하고 물었다. 구인제자가 이에 순응하니, 소태산은 10일간 치재를 더하게 한 후 7월 26일을 최후 희생일로 정하고, 그날 기도 장소에 가서 일제히 자결하기로 약속했다.
7월 26일 당일, 구인은 모두 만면(滿面)한 희색으로 시간 전에 일제히 도실에 모이는지라, 소태산 찬탄하며 구인에게 마지막 남길 말을 물으니, 정산 답하기를 “저희들은 이대로 기쁘게 가오나 남으신 대종사께서 혹 저희들의 이 일로 하여 추호라도 괴로우실 일이 없으시기를 비나이다”(《정산종사법어》 기연편3)라고 했다. 소태산은 청수를 도실 중앙에 진설케 하고, 각자 가지고 온 단도를 청수상 위에 나열케 한 후, 일제히 ‘사무여한(死無餘恨)’이라는 최후증서를 써서 각각 백지장(白指章)을 찍어 상 위에 올리고, 결사(決死)의 뜻으로 엎드려 심고하게 했다.
이어 소태산이 증서를 살펴보니, 백지장들이 곧 혈인(血印)으로 변했으므로, 이를 들어 단원들에게 보이며 “이것은 그대들의 일심에서 나타난 증거라” 하고, 곧 불살라 하늘에 고(告)한 후 기도 장소로 떠나는 제자들을 다시 불러 말하기를 “그대들의 마음은 천지신명이 이미 감응했고 음부공사가 이제 판결이 났으니, 우리의 성공은 이로부터 비롯했다. 이제 그대들의 몸은 곧 시방세계에 바친 몸이니, 앞으로 모든 일을 진행할 때에 비록 천신만고와 함지사지를 당할지라도 오직 오늘의 이 마음을 변하지 말고, 또는 가정 애착과 오욕의 경계를 당할 때에도 오직 오늘 일만 생각한다면 거기에 끌리지 아니할 것인즉, 그 끌림 없는 순일한 생각으로 공부와 사업에 오로지 힘쓰라” 했다.
이어 모두 중앙봉에 올라가 기도를 마치고 오게 한 후 단원들에게 법명을 주며 말하기를 “그대들의 전날 이름은 곧 세속의 이름이요 개인의 사사 이름이었던 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세계 공명(公名)인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원불교교사》 제1편 제4장) 했다. 이것이 원불교 법명의 효시이다. 또한 이것이 거룩한 백지혈인의 법인성사(法認聖事)였다. 이 구인 기도와 법인성사는 곧 무아봉공의 정신적 기초를 확립하고, 신성ㆍ단결ㆍ공심을 더욱 굳게 한 새 회상 건설의 일대 정신 작업이었다.


▣ 이력사항
20160506 구 웹사이트 등록 / 고대진

20181226 이전 등록/고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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